영화 ‘흑수선’에서 주목받는 것은 당연히 이미연이다. ‘흑수선’은 극중 손지혜(이미연 분)의 암호명. 그녀는 남로당 출신 빨치산 대원으로 나오지만 그렇다고 여전사는 아니다. 평생을 사랑에 걸고 영화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중점에 서 있는 역할로 안성기와 비극적인 사랑을 나누는 주인공이다.
무엇보다 영화 ‘흑수선’은 오직 한 여자를 향한 사랑으로 일생을 바친 황석(안성기 분)과 그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인 채 긴 비극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손지혜의 ‘러브로망’이 가장 큰 감동을 준다는 것이 중평.
영화는 연쇄살인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오형사(이정재 분)가 그 속에 숨은 역사의 비극과 오랜 세월 가슴에 묻은 두 남녀의 사랑을 목격해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목격하는 비극 속에는 한국전쟁 당시 ‘흑수선’이란 암호명으로 암약한 여자 손지혜와 그녀를 가슴에 품은 채 모든 것을 내던진 머슴의 아들 황석이 존재한다. 자신들의 인생을 오로지 사랑에 기댄 채 거대한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질긴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들이 마침내 해후하는 라스트 신에서는 진한 감동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미연은 배창호 감독, 안성기·이정재·정준호 등과 모두 ‘흑수선’에서 처음 만나 호흡을 맞췄다. 이렇게 한 작품에서 만나기도 힘든 쟁쟁한 인물들이다. 80년대 한국영화의 흥행을 주도했던 배창호 감독과 이제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 안성기, 그리고 이정재와 함께 7개월간 동고동락했는데 그녀는 “동료애를 넘어 ‘전우애’를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 소녀부터 노인까지 50년을 넘나드는 역할을 소화해 내야 해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수중촬영. 소독된 수영장 물에서도 눈을 못 뜨는 그는 지푸라기가 보이는 흙탕물 속에서 눈을 크게 뜨는 곤욕을 치렀다. 또 영화배우에게 “촬영장은 회사”라고 말한 이미연은 “한 작품 할 때마다 하나씩 배워나가는 게 즐겁다”고 한다. 그녀에겐 일중독 증세가 있다. 새 영화에 캐스팅되면 그녀의 성격을 아는 여고 동창들은 전화를 안한다. 전화도 안 받고 만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물고기자리’, 컴필레이션 앨범 ‘연가’의 타이틀롤로 부각된 이후 영화 ‘인디안 썸머’와 KBS 사극 ‘명성황후’에 이어 영화 ‘흑수선’까지. ‘제2의 전성기’라고 불릴 만큼 이미연은 쉴 틈 없이 달려왔다. 건강이 악화돼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평소의 그녀는 놀랍도록 씩씩하고 생기발랄하다. 여자 나이 30세이면 이제 주름을 걱정해야 될 나이지만 이미연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듯 아직도 팽팽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나이에 맞는 성숙한 모습도 보인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촬영장에만 오면 남다른 열정을 쏟아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미연의 매력이다.
그녀의 늙지 않는 비결은 땀 흘리는 운동. 아무리 바쁘고 귀찮아도 이 악물고 일주일에 네 번은 서울 청담동 헬스클럽으로 향한다. 러닝 머신 위에서 뜀박질하는 순간을 가장 행복하게 여긴다는 이미연. 덕분에 군살 하나 없는 균형 잡힌 몸매가 갖춰졌다. 컨디션도 좋아져 밤샘 촬영을 해도 잘 지치지 않고 지금은 제법 근육이 발달해 배에 왕(王)자가 새겨진다고.
유쾌하지 않겠지만 그녀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혼과 재혼 문제. 평소 잘 웃는 그녀지만 ‘날마다 즐거워’는 아니다. 웃고 있다가도 갑자기 확 쓸쓸해질 때가 있다. 주위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남자 만나서 빨리 재혼하라고 한다. 자주 통화하는 김승우도 재혼을 말리지 않는다. 본인도 ‘독신을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들려준다. 하지만 김승우는 잃고 싶지 않은 친구이고 열애설도 어불성설이다. 그녀는 아직 사랑을 할 여유가 없다.
영화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로 유명한 이미연. “영화가 나를 살아 있게 해주지만 또 죽도록 힘들게 하는 것도 역시 영화”라고 말한다. 여운이 남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흑수선’이 바로 그런 영화”라고 강조한다.
연말까지 차기작 고민을 미뤄놓은 이미연은 최근에 출연한 세 작품에서 모두 죽는 역을 연기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밝고 경쾌한 역을 해보고 싶다고. 하루가 다르게 ‘예쁜 스타’ 이미연보다는 연기력이 돋보이는 ‘배우’가 되어가는 그녀. ‘흑수선’에서도 그 저력을 빛낼 수 있을지 선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