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바기오시 ‘바기오 꽃 축제 거리 퍼레이드’ 모습.
필리핀 문화탐방 2006년 2월24일~28일 ▲1회-3월14일 필리피노의 자유로움에 대해서- 기행문, 이정우(천안흥타령축제 기획운영분과위원장) ▲2회-3월21일 바기오 꽃 축제와 천안흥타령축제 비교연구, 김춘식(천안흥타령축제 기획단장)
천안시는 흥타령축제가 짧은 역사 속에서도 국가지정문화축제로 거듭날 수 있게 된 점을 고양 발전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해외축제 견학을 지난 2월24일(금)부터 28일(화)까지 3박5일 일정으로 실시했다. 견학방문단은 핀리핀의 바기오시 (바기오 꽃 축제)를 관람하고, 흥타령축제에 접목할 수 있는 축제의 장점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본지는 견학단의 축제 참여 의미를 살펴보고, 지역축제의 발전적 가치를 찾는 기획단의 활동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저녁 8시, 인천공항을 출발,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을 헤아리며 문화탐방은 시작됐다.
흥타령축제 기획단과 춤경연 수상자들을 태운 항공기가 필리핀 마닐라국제공항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트랩을 내리자마자 텁텁한 열대 특유의 습기와 근처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민다. 현지 시간 오후 11시30분. 밤 공기에 가라앉은 메트로 마닐라의 풍광은 마치 과거로 여행을 떠나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서둘러 공항을 빠져 나온 일행은 아침 일찍 바기오로 향하기 위해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다.
태평양 한가운데 섬나라의 새벽녘은 고적했다. 아침 햇살에 밀려 파란 하늘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나 보다.
침실 안으로 밝은 기운이 흘러들자 안온이 밀려든다. 아! 무한한 자유. 무엇이든 할 수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탐방의 첫 행로는 꽃 축제가 펼쳐지는 바기오였다.
국제선과는 달리 필리핀 국내항공기 안에는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헝클머리의 네그리토 니그로 족, 이들은 멀리 고대시대에 거슬러 올라 보르네오를 거쳐 배를 타고 이곳으로 건너와 종족을 이루어 왔으며, 1521년 마젤란이 필리핀의 일부 섬인 사마르 섬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이들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비행기로 1시간 남짓, 마닐라로부터 북쪽으로 250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1600m에 자리잡고 있는 바기오는 세계 8대 불가사이 중 하나인 ‘라이스테라스(계단식 논)’가 있고, 휴양지로서 널리 알려진 도시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 더위 속의 마닐라와는 달리 고산지대인 바기오는 20도 안팎의 서늘한 지방이다.
산의 정상부근에 위치한 도시라서 비탈을 깍아 만든 건물들과 집들이 인상깊다. 시내로 들어서자 제법 도시의 면모가 나타난다. 번화가라지만 마치 우리나라의 60년대 영화 촬영 세트 같다. 출입문이 따로 없는 이곳의 대중교통 수단인 20인 승 미니 트럭 ‘지프니’에는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마치 먼지를 뒤집어쓴 빛 바랜 6, 70년대 식으로 골동품 창고에서 굴러 나온 것 같다.
기사 자리 옆에 엔진룸이 볼록 튀어나와 있고 차체 한가운데에 접이식 문이 달린, 30~40년 전 서울의 시내버스 모양. 깨진 유리에는 얼기설기 테이프를 붙여놓았다.
낡은 간판을 매단 허름한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여자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아주 검고 길다. 낯선 이국 풍경에 젖다 보니 한나절의 여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산 정상까지 오르내리는 도로들 밑으로 까마득한 절벽, 그리고 산과 계곡사이를 차가 미끄러져 내려간다.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마다, 용트림치며 힘차게 뻗어나간 산줄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구름이 내려와 앉은 산등성이 여기저기에는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아스라이 보인다. 섬 민족 특유의 다양한 민속과 최대 꽃 재배지라는 특성을 살린 ‘바기오 꽃 축제’ 때문인지 거리 가득 사람들로 넘쳐났다.
축제장 한 켠, 옆자리에 앉아 우리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걸어온다. 자기 이름은 루이스이고 본똑에서 농사를 짓는데 축제를 보러 왔다고 한다. 그런데 허름한 입성에 초라한 몰골을 한 그의 입에서는 정확한 발음의 유창한 영어가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교육의 힘이었다.
부잣집 자식들만 다닐 수 있는 사립학교에서만 영어로 가르치는 필리핀 거의 대부분 지역과 달리, 북부 루손의 몇몇 주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모든 활동과 수업이 영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두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한다.
사실 그랬다. 우리가 여행했던 마닐라, 바가오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참 잘했다. 그뿐인가? 필리핀의 국어인 따갈로그어, 북부 루손의 보편어인 일로까노어에 각 고장의 고유어까지도.
탐방 3일째 아침, 지역지역마다의 특유한 민속의상과 악기, 꽃마차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축제장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로하칸 공항을 거쳐 마닐라로 돌아왔다.
남은 이틀간은 마닐라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화탐방이었다. 맨 처음 일정은 팍상한 폭포였다.
마닐라에서 남동쪽으로 100Km 떨어진 세계 7대 절경의 하나라는 팍상한 폭포는 카누의 일종인 ‘방카’라는 배를 타고 울창한 밀림을 거슬러 올라야했다. 원주민 두 명이 끌고 당기며 40여 분 정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절벽의 크고 작은 폭포에는 시원스레 물이 쏟아져 내린다.
사공들은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거센 물살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모습이 거의 묘기에 가까워 감탄을 자아낸다. 신비의 계곡처럼 막힌 듯 열리는 계곡을 거슬러 세계의 절경 앞에서 진정 그 명성을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탐방 4일째, 필리핀의 국민적 영웅 호세 리잘(Jose Rizal)의 혼을 담고 있는 로하스 거리의 리잘공원에서 그가 처형당하기 직전 조국 필리핀을 위해 남긴 시 ≪나의 마지막 고별≫을 읽었다.
잔디밭과 수목이 아름답게 배치된 공원 안에는 지구를 본뜬 분수대가 인상적이었고, 공원 동쪽의 인공호수에는 필리핀 전체모형이 만들어져 있어 7107개의 섬으로 되어있는 필리핀 군도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30도가 웃도는, 뜨거운 태양이 내려 쬐는 마닐라의 한낮은 대단했다. 쏟아지는 땀을 연신 훔쳐내며 우리 일행은 인트라무로스 북서쪽 파시그강 기슭에 위치한 산티아고 요새로 향했다.
마닐라만을 살펴볼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로 스페인군대의 사령부이자 감옥으로 쓰였던 산티아고 요새 안쪽의 리잘채플이라는 벽돌집에는 리잘이 스페인군에 의해 처형되기 전 감금당해 있던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북쪽 성벽에는 악명 높은 지하감옥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는데 지하감옥은 수면보다 낮기 때문에 밀물 때는 천장까지 물이 차서 죄수가 익사하게 되는데, 시체는 문을 열어 파시그강으로 떠내려보냈다 한다.
다섯 차례의 대지진과 2차 대전 중에도 파괴되지 않아 기적의 교회라 불리우는,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양식의 산 어거스틴 성당과 아시아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마닐라 대성당을 둘러본 일행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귀국 길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 문화탐방의 끝자락에서 ‘자유로움의 대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차갑게 냉장된 필리핀 산 맥주, 산 미구엘 한 캔을 마시며 갑자기 누군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다.
“자유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자유로움에 대한 대가를 생각합니다.”
자유로움의 대가는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었을까? 공항에서 여행객들의 옷소매를 거의 붙잡을 듯 다가와 택시에 탈 승객을 호객하는 허름한 옷의 필리피노는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택시 승객을 태우기 위해 뜨거운 지열로 화끈거리는 공항 근처를 배회할 것이다.
또한 침대 머리맡에 놓인 1달러 짜리 팁과 함께 메모지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던 객실 청소부는 오늘도 또 다른 손님을 맞으며 아침마다 여전히 팁의 행적을 쫓으리라. 인트라무로스 입구에서 세월을 낚고있는 마부꾼도, 양철 지붕 집 빨래 줄에 다닥다닥 널린 빨래들도 여전할 것이고, 버스 창가로 손을 흔들던 가무잡잡한 피부에 해맑게 빛나던 아이들의 눈동자도 여전할 것이다.
내게 꽃을 건네주던 팍상한 카누지기 부자도 늘 그렇듯이 또 다른 관광객에게 꽃을 건넬 것이다.
자유로움의 대가(代價). 필리핀 사람들은 자유로움에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비록 불편하고 어렵고 지저분해도 그 어떤 가치보다도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기에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즐겁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아마 세월이 흘러도 필리핀은 늘 그 모습 그대로 일 것이다. 비록 속도를 낼수록 터덜거리는, 폐차된 자동차에서 뜯어낸 고물 엔진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 지프니를 한없이 사랑하는 저들. 정해진 정류장 없이 같은 방향이다 싶으면 아무 데나 손을 들어 타고 내리고 매달리는 저들, 필로피노들의 자유로움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