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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를 읽고

등록일 2018년09월04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촐라체는 에베레스트에서 동쪽 방향에 있다. 에베레스트 옆에 로체가 있고 눕체가 있으며 다음으로 푸모리, 춤부, 로부체, 다음으로 촐라체가 있다.

 

그런데 웬 생뚱맞은 '촐라체'냐고....


 

 

그곳엔 상민과 영교가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영혼들, 사랑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수단인 목숨줄을 내놓고 삶과 죽음의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은 5천미터가 넘는 산도 일반적으로 '마운틴'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정도의 산은 '힐'이라고 부른다. 인생에서 만나는 고틍스런 굽잇길도 그저 언덕이라고 부르면서 환하게 넘고자 하는 본원적인 낙관주의야말로 살아있는 것들이 가진 존의 빛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절대로 훼손되지 않는, 존재가 품고 있는 영원성이다.>

 

 

작가 박범신이 밝히듯 소설 '촐라체'의 서사구조는 간명하다.

 

아버지가 다른 형제가 촐라체 북벽에서 6박7일간 겪는 지옥같은 조난과 놀라운 생환과정

그 속에서 야성과 인간한계의 벽을 넘어서려는 사나이들의 투혼이 있다.

 

'촐라체'는 그 죽음의 사투라는 놀라운 흥미거리가 읽는 내내 긴장감을 전달해주지만, 그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숱하게 널려있기도 하는 평이한 줄거리일 뿐이기도 하다.

 

 

난 읽는 내내 '촐라체'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도대체 뭐야?-

 

박상민과 하영교도, 전인미답 단독등반한 유한진도, 화자인 나도, 모두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신음하는 인물들이다. 기껏해야 삶의 무게를 못이겨 도망치듯 촐라체를 찾은 이들. 산과 마주하고서야 자신을 돌아보게 된 사람들은 모두 나약한 인물이기도 했다.

 

-나약함이란 뭘까?-

 

그건 내 존재성과 자긍심을 잃어버렸을 때다.

 

나는 종종 그 존재성과 자긍심 한자락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가는 힘을 얻은 이들을 봐왔다.

 

'타이타닉'이 그랬고 '메디슨카운티의 다리'가 그랬다.

 

'백년동안의 고독'도, '독일인의 사랑'도, 그리고 영화 '서극의 칼'에서도....

 

그러고 보면 사람은 어떤 추억을 가질 수 있는가에 존재이유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이를 맹신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다행히 '촐라체'는 해피엔딩'이다.

 

그들이 살아돌아와서도 아니고, 겨우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한 채 목숨을 부지해서도 아니다.

 

바로 '촐라체'라는 아름다운 추억이 평생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그들 생명줄에 기름을 칠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촐라체는 더이상 외부적인 대상이 아닌, 상민과 영교와 화자의 마음속 촐라체가 돼버렸기에...

 

그들이 부럽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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