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ungnamsisa.com
천안시장후보 인물탐구4 - 성무용-기업·정치 경험살려 ‘천안시 경영’ 출사표
뉴스일자 : 2002년05월25일 00시00분

산골소년-운동선수-샐러리맨-기업인-사회사업가-정치인 천안시장 후보 성무용이 걷고 있는 인생길이다. 그의 일 욕심은 끝이 없고 어느 한 곳에 머무는 것을 강하게 거부한다. 사람들은 그를 ‘일벌레’라 부르고 있다. 학창시절, 운동·공부 만능 재주꾼 성무용(59·천안시 오룡동)한나라당 천안시장 후보는 일제말기인 1943년 12월 천안시 원성동 장태산 기슭의 외딴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해방직전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당시 평범한 농가의 장남이었던 아버지 성호봉씨(2000년 작고)는 삶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무작정 천안읍내로 향했다. 책임감 있고 성실했던 아버지는 공장과 장터를 누비며 집안을 조금씩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1년전인 49년 성 후보는 제이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천안읍내에는 제일(천안초), 제이(남산초), 제삼(중앙초)국민학교가 있었다. 이 중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서울로 진학할 수 있었는데, 한 해에 6∼7명 정도. 줄곧 전교 1∼2등을 차지했던 성 후보는 서울 용산중학교에 무난히 진학할 수 있었다. 그 때 성 후보의 나이는 12살. 중학시절 성호봉씨는 아들이 잘못된 길로 빠질까봐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천안출신 대학생이 많이 기거하는 하숙집에 성 후보를 맡겼다. 그리고 교내 연식정구부에 가입시켜 학업과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성 후보는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용산중 정구부를 전국 최고 반열로 이끌었다. 최근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 나섰던 이부영 의원과의 만남도 용산중에서 이뤄졌다. 고교 진학때가 되자 몇몇 학교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그러나 성 후보는 용산고를 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구부를 지도하던 박영덕 교사를 만났다. 그는 성 후보에게 보다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학업에 전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때 큰 깨달음을 얻은 성 후보는 운동 못지않게 학업에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성적이 크게 향상됐고, 고교졸업과 함께 연세대 상과(현 경영학)에 진학했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우리 6남매에 대한 아버지의 교육열은 대단하셨다. 당신이 못배우셨기 때문에 자식만은 무슨 수를 써서든 가르치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념이셨던 것 같다. 때맞춰 아버지의 사업도 잘 돼 가정형편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원만한 성격과 운동을 통해 갖춰진 포용력 때문인지 주변에는 늘 친구가 많았다. 이 모두가 부친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성 후보는 말했다. 한국사의 가장 암울했던 두 시절을 체험한 그는 고통에 신음받는 이 사회를 위해 일하겠다는 꿈을 그때부터 갖게 됐다고 회상했다. 청년시절, 무역회사에서 경영 수업 대학시절엔 다양한 활동과 체험을 통해 사고의 폭을 넓혀 나갔다. 보컬그룹에 가입해 기타를 연주하며 대학문화를 체험하는 한편, 교내 뜻있는 학우들과 함께 ‘경제연구활동클럽’이라는 동아리도 창설했다. 당시 최대 이슈는 화폐개혁. 화폐가치를 10분의 1로 떨어뜨리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성 후보는 학우들과 함께 경제학을 지도하는 저명한 교수진을 초빙해 밤새 열띤 토론을 벌이며,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기도 했다. 또한 대학 재학시절 가장 큰 선택의 갈림길은 입영문제. 성 후보는 학업의 중단을 피하기 위해 ROTC(학군단)에 자원해 남은 학업일정을 마쳤다. 67년 군복무를 마친 성 후보는 ‘상신산업’이라는 무역회사에 입사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 회사에서 12년간 몸담으며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일본, 미국 등 바이어를 상대하며 회사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업가적 기질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79년 무역회사 업무를 통해 충분한 사업적 노하우를 축적했다고 생각한 그는 12년간 젊음을 불태웠던 회사를 떠난다. 무역담당 이사직함까지 갖고 있던 성 후보는 훌훌 털고 고향 천안으로 돌아와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가 36세. 기업경영과 사회사업 병행 79년 천안으로 돌아온 그는 업성동에 ‘(주)진왕산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적연와(빨간벽돌) 등 건축자재공장을 설립?운영했다. 건축이 활발하던 당시 사업은 날로 확장됐다. 그러나 주거형태가 점차 아파트로 변하면서 수요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까지 운영하던 공장은 그의 국회입성과 함께 접고 말았다. 현재는 ‘(주)대성냉동’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성 후보가 천안으로 돌아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사회사업이다. 그는 먼저 동천안청년회의소에서 활동하며 지역의 청년들과 지역발전을 함께 고민했다. 그리고 당시 활발했던 새마을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다. 그는 83년부터 87년까지 새마을운동본부 천안시 지회장을 맡으며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열성을 보였다. 그 결과 84년 전국 새마을운동 실적평가 2위, 이듬해 전국 1위를 차지하며 천안을 새마을운동 모범도시로 만들었다. 첫사랑이 평생 반려자 대학 4년때 고교후배의 소개로 만난 최무자(57)씨가 성 후보의 첫사랑이자 평생 반려자다. 당시 최무자씨는 경남 진주출신으로 성균관대 도서관학과에 재학중인 새내기였다. 둘은 양가의 따뜻한 축복속에 70년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아들 원준(32)씨를 그리고 다시 2년 후 딸 민선(30)씨를 낳았다. 현재 원준씨는 대학강단에서 일하며 공학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딸 민선씨는 미국유학과 이화여대 석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광고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성 후보는 이들이 가장 소중하고 든든한 버팀목이며, 큰 힘이 돼주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청 신설 입법발의, 천안상의 대륙진출 ‘뿌듯’ 성 후보는 지난 88년 민주정의당 천안시지구당 위원장직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정치인생을 걷게 된다. 당시 민정당의 공천을 받은 성 후보는 13대 국회진출을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92년, 다시 14대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를 지역 유권자들은 국회로 밀어줬다. 직접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그는 본격적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연구와 입법활동에 들어갔다. 96년 중소기업청이 신설된 것은 성 후보의 입법발의에 의한 것이며, 의정활동 중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또한 대정부질문을 통해 대기업 중심의 정책을 질타하고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로 인해 국회의원 시절 ‘중소기업 박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15대와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에 대해 성 후보 측근에서는 외길정치인생을 걸어온 ‘영광과 상처’로 표현했다. 한편 천안상공회의소에 몸담으며 지역 중소기업의 권익보호활동을 펴온 것도 그의 보람이라고 피력했다. 특히 그가 93년부터 올해 3월까지 10대, 11대, 12대 9년간 천안상의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가장 큰 성과는 중국땅에 천안상의 공단을 조성키로 중국정부와 합의한 것이다. 중국에 민간단체 이름으로 공업단지를 조성한 것 자체가 한국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성 후보는 “그동안 전문경영인으로 정치·행정가로, 각종단체의 봉사자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천안시민과 함께 천안시를 경영하겠다”고 밝혔다. 성무용 개인신상기록 ○생년월일 : 1943년 12월1일 ○출 생 지 : 충남 천안시 원성동 38번지 ○본 관 : 창령 ○혈 액 형 : O형 ○신 장 : 174㎝ ○체 중 : 76㎏ ○군 복 무 : ROTC 만기제대(육군소위) ○가족관계 : 처, 아들, 딸, 며느리, 손녀 ○재 산 : 39억5천5백만원 ○납세실적 : 3천3백54만원 ○미 납 세 : 없음 ○학 력 :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상과 졸업, 단국대학교 경영대 학원?행정대학원 졸업 ○주요경력 : 제14대 국회의원, 천안상 공회의소 회장(10, 11, 12대), 대한광업진흥공사이사장 ○감명받은 책 : 삼국지 ○존경하는 인물 : 박정희 ○좋아하는 스포츠 : 테니스 ○주 량 : 소주1병 ○담 배 : 안피움 ○좋아하는 음식 : 김치찌개 ○좋아하는 연예인 : 안성기, 장나라 ○종 교 : 무 ○별 명 : 일벌레 ○저 서 : 지역발전과 중소기업의 역할(논문), 지방정부의 재정 자립에 관한 연구(논문) ○좌 우 명 :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자 ○어릴적 꿈 : 사회사업가 ○애 창 곡 : 동행(최성수) ○본인 자동차 차종 : 다이너스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장품 : 장서 ○취 미 : 스포츠

<이정구> 기자
이 뉴스클리핑은 http://chungnamsisa.com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