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타’를 세계적인 공연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PMC 프로덕션 대표 송승환.
공연기획자 송승환 청와대 ‘상춘포럼’ 강연 지상중계
탤런트, 영화배우, MC 그리고 이제는 연극제작자까지 그 직함만큼이나 미래를 향한 변신을 거듭해 온 송승환(47) PMC 프로덕션 대표가 지난 18일(수) 청와대를 찾았다. 송승환은 이날 청와대 직원들의 학습모임인 상춘포럼에서 ‘난타, 기획에서 세계까지’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향한 도전의 이력을 설명해 나갔다. 협소한 국내시장의 돌파구를 해외로 눈을 돌려 찾아낸 송승환은 우리 연극이 당면한 자본의 열세, 언어의 문제를 ‘난타’라는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소재의 비언어 연극으로 돌파해 세계 20개국 1백50개 도시 순회공연이라는 쾌거를 일궈냈다. 또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서울의 난타 전용극장은 필수 코스가 되고 있다. 다음은 “원자재가 없는 나라에서 문화산업만큼 무궁무진한 발전가능성이 있는 산업은 없다”고 밝힌 송승환의 청와대 강연 내용(www. cwd.go.kr)을 요약한 글이다.
<편집자주>
문화상상품을 갖고 해외에 팔아보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장애물이 많았다. 첫째, 자본의 규모였다. 해외로 나가자면 세계적인 프로모터에게 이를 팔아야 하고, 전제는 경쟁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품의 평균 제작비는 120억원 정도로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우리의 7억과는 완성도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할 방법이 떠올랐다. 브로드웨이의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라도 나보다 한국이나 동양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소프트웨어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둘째, 언어였다. 비행기로 한국을 1시간만 벗어나도 한국어가 가지는 언어로서의 효용가치는 없었다. 대사를 통해 스토리를 전달해야 재미도 기쁨도 슬픔도 줄 텐데 한국말로 어디에 가서 공연을 할 수 있겠나. 그래서 생각한 것이 언어 없는 연극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소재로 비언어 연극을 만들자, 이것이 ‘난타’를 만든 배경이었다.
한국적인 것을 생각하니 사물놀이가 떠올랐다. 또 연주가 아닌 드라마로 생활주변에서 북을 두드릴 공간을 생각하니 부엌이 적격이었다. 세트를 주방으로 하고 등장인물을 요리사로 해 에피소드를 꾸미고 사물놀이 리듬으로 두들겨보면 재미있는 연극이 될 것 같았다. 김치를 굿거리로, 파를 자진모리 장단으로 썰고 마늘을 휘모리로 찧어 보자, 이렇게 첫 연습을 시작했고 6개월 정도 긴 연습과정을 거쳐 1997년 호암아트홀에서 첫 막이 올랐다. 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막을 올리고 나니 놀라웠고 뜨거웠다. 관객은 이런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울과 지방 공연을 끝내고 나니 배우와 스태프들이 해외로 가자고 외쳤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해외 수출용으로 한다고 공언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해외로 가자고 해도 아무런 대책도 정보도 없었다. 더구나 단군 이래 한국 연극을 돈 주고 팔아본 적이 없었다. 공연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98년 봄 동경, 뉴욕, 런던, 파리 등 5대 도시로 출장을 떠났다. 런던에서 만난 프로모터는 다짜고짜 작품에 대해 좋다 나쁘다 싸다 비싸다 한 마디 없이 “한국에서도 연극을 하느냐”고 하더라. 화가 났다. 더욱이 한국 연극을, 한국 영화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한국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딱 세 가지를 알고 있었다. 사우스코리아, 노우스코리아 그리고 판문점이라는 단어였다.
국가 이미지 중요성 절실히 깨달아
국가 이미지가 낮아서는 세계시장에 팔아먹을 수 없다. 일본 하면 후지산, 기모노, 스시처럼 코리아 하면 떠오르는 시각 이미지가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지 마케팅에 실패했다. 난타 공연을 위해 20개국 1백50개 도시를 돌아다녔는데 깨달은 것은 결국 국가브랜드, 국가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그 작업에 소홀했고 이 점이 아쉽다.
그러다가 생각해 본 것이 ‘복덕방’을 찾자는 것이었다. ‘브로드웨이 아시아’란 에이전트 회사와 연결이 됐고, 이 회사는 원래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아시아에 팔아먹기 위한 회사였지만 거꾸로 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했다. 이 회사와 어렵사리 계약을 맺으면서 검증을 요구해 와 세계적인 연극축제인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작품을 내놓고 거기에서 평가를 받기로 했다.
가보니 암담했다. 극장 대관료 등은 마련했으나 광고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76년 신촌 소극장 시절에 돈이 없어 쓰던 홍보방법이었다. 모두가 총동원돼서 밤새 에딘버러 시내 전체를 난타 포스터로 도배한 것이다. 얼마나 많았던지 올해 연극축제에는 난타 공연밖에 안 하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빨간 바탕에 네 명의 동양인이 식칼을 들고 서 있는 포스터는 독특했고, 51년 역사의 연극축제에 한국이 처음 참가했다는 점이 감안돼서 기자들에게 프리뷰 하는 기회가 축제위원회로부터 부여됐다.
우리 순서가 되자 여기에서도 독특하게 등장했다. 무대 위에 도마 네 개를 깔아놓고 네 명이 식칼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등장했고 마구 두들기니 졸고 있던 기자들도 깨어나고 이 장면은 다음날 가디언 등 현지 언론에 대대적으로 실렸다. 이후 매회 매진됐고 네 차례 추가공연도 했다. 그래서 이를 타이틀을 달아 해외시장에 팔기 시작했다.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난타를 1년 내내 전용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에 오는 관광객들이 특히 밤에 구경할 거리가 없다는 것에 착안해 마케팅 타깃을 외국인 관광객으로 잡았다.
이렇게 전용관이 생기고 외국시장이 개척되면서 연 100억원 이상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07년까지 1000억원 달성이 목표다.
그래서 문화산업이 중요하다. 원자재와 공장이 필요 없다. 양파와 식칼만 있으면 된다. 원자재가 없는 나라에서 문화산업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산업이다. 아직도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한국 드라마가 히트를 친 대만에서는 이곳에 진출하고 있는 부엌가구 회사가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제일 많이 보는 층이 주부들이고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 아파트의 실내 소파와 주방가구가 너무 멋있다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이렇게 문화산업은 다른 산업에 미치는 파생력이 엄청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