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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트로피는 경매에 붙여볼까?”

등록일 2004년03월06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지난 2월15일 폐막한 제54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인 은곰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10번째 영화 ‘사마리아’(제작 김기덕필름)가 지난 5일(금) 국내에서 개봉됐다. 본래 12일 개봉을 앞뒀다가 베를린 수상 이후 관객들의 상영문의가 빗발치면서 일주일 앞당겨 개봉한것. 주류영화에 어울리지 못하는 ‘영화계의 이단아’로, 평단의 논란 한가운데 선 ‘문제적 감독’으로, 말랑말랑한 상업영화를 거부한 ‘마니아군단의 영웅’으로 극장주들로부터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김기덕 감독으로선 통쾌한 반전인 셈이다. 개봉에 앞서 지난 2월24일 서울 중앙시네마에서 열린 첫 언론시사회장에서 예의 야구모자를 눌러쓴 김기덕 감독을 만났다. ▶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수상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영화에 대한 흥행기대도 높아졌다. -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나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고나 할까. 영화는 관객들이 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해야 한다. 영화제 수상이 질적수준의 상승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상이란 것이 영화를 평가하는데 연막이 되어서도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 다만 어떤 점에서 내 작품을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지 그런 부분을 되새겨보기 바란다. ▶ ‘사마리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 인생을 살다 보면 잘못하고 실수하는데 그걸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주제가 담겼다. 이 영화는 보는 관점에 따라 추상으로 볼 것이냐, 구상, 반추상으로 볼 것이냐 달라진다. 사람들은 재영과 여진이 어떤 행위를 하든 원조교제라는 비도덕적 관점으로 보기에 가해자로 규정하고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원조교제 상대인 남자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감독은 다른 시각을 보여줘야 하기에 캐릭터 하나 하나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원조교제라는 문제의 공범은 우리 자신일 수 있다. ‘9시 뉴스’처럼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사고로 영화를 본다면 할 말이 없다. 내 영화는 작위적인 게 아니라 반추상적인 관점을 담았다. ▶ 무명의 신인배우들을 캐스팅했는데. - 신인들은 백지처럼 순수하고 맑은 느낌이 든다. 영화를 찍으며 그들이 성숙해져 가는 것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 ▶ 11일 만에 영화를 완성했는데, 자금상의 어려움 때문인가? - 제작비에 맞추기 위해 스케줄을 앞당긴 것도 있지만, 한 번 리듬을 타면 몰아쳐 찍는 버릇이 있다. 일단 머릿속에 영화에 대한 이미지와 아이템이 떠오르면 놓치고 싶지 않아 강행을 하곤 한다. (실제로 배우들은 촬영이 시작되면 밥 먹을 시간은커녕 옷 갈아입을 여유조차 주지 않아 힘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 종전 작품과 달리 노출이나 파격성을 자제했는데, 특히 구원과 화해라는 소재가 인상적이다. - 후반 20분 정도가 전체적인 충격을 완화하고 있지, 중반까지는 섬뜩할 만큼 날카롭게 전개된다. 다만 예전과 달리 보이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그런 느낌을 주도록 연출했다. 구원과 화해란 보이지 않은 곳에서 늘 손을 뻗치고 있기에 유령과도 같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이고, 그렇기에 인생이 그나마 살아볼 만한 것 아닐까.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이후로 내 작품세계도 많이 변한 것 같다. ▶ 한국영화 르네상스에 대한 명암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 천만관객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안방이나 심지어 고스톱판에 있던 사람들까지 극장으로 끌어들였으니…. 그러나 한두 영화에 관객들이 몰린다는 것은 저예산 작가들이나 감독들에겐 실의에 빠질 만한 일이다. 이 문제는 영화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극장에서의 페어플레이가 시급하다. 10개 스크린이 걸린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한 영화가 5개 이상 상영되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저예산영화에도 30∼50개 이상의 스크린수를 보장해 줘야 한다. 작가는 많고 우수한 영화인들이 매년 배출되고 있는데 이들이 상업적 성공만을 위한 ‘한탕주의’로 빠지게 해선 안 된다. 홍콩영화의 몰락을 답습할 수도 있고 스크린쿼터제도 위협받을 수 있다. 한 영화를 5백 개가 넘는 스크린에서 쓸어 담지 말고 2백 개관이 2, 3개월간 장기적으로 상영하도록 배급사와 영화관계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적어도 영화인이라면 공감하고 개선해야 한다. 장사꾼이라면 이런 부탁 하지도 않는다. 차기작은 유럽자본으로 찍을 예정 ▶ ‘사마리아’란 제목에서 종교적 분위기가 나는데. - 불교 영향권 아래인 한국에 살면서 어린 시절 절에도 많이 다녀봤고, 목회학을 공부하며 야간신학교에 다닌 적도 있다. 또 해병대에서 훈련을 받았고 프랑스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내 작품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가 여러 가지 몽타주 되어 영화 속에 스며들어 있다. ‘사마리아’는 전혀 종교적인 영화가 아니다. ‘死마리아’, 즉 마리아는 죽었다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버림받은 사람들과 실수에 대한 흑백논리를 깨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성서적 사건처럼, 이 영화는 이 시대에 던지는 질문과 그에 대한 감독의 소박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다.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서 각자의 삶의 성숙도에 따라 다양한 해답을 찾길 바란다. ▶ 베를린 감독상의 무게가 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까. 차기작에 대한 계획을 알려달라. - 은곰상 트로피를 경매에 부쳐서 다음 영화 제작비에 보탤까도 생각중이다. 그러면 상에 대한 부담감도 덜지 않을까. 다음 작품은 머릿속에 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다. 입양아 문제를 다룬 ‘유리’라는 제목의 영화를 유럽자본을 받아 유럽에서 만들 계획이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인터뷰 공세에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빽빽이 모여든 취재진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김기덕 감독. 그를 보고 있자면 ‘어깨’에 힘이 한껏 들어가 범접 못할 장벽을 치고 대중을 휘둘러보는 일부 스타급 배우와 감독들로 인해 위축된 가슴이 눈 녹듯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사시사철 변함없는 그만의 스타일, 눌러쓴 야구모자와 빛 바랜 카키색 점퍼 때문이리라. 베를린 시상식 때도 그는 이런 차림을 고수했다. 김 감독은 “모자를 벗으면 벌거벗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언제 어디서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논하기를 좋아하는 감독 특유의 친근한 성격도 한몫을 더한다. 김 감독은 국내에서 열리는 각종 국제영화제에 단골 게스트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빠듯한 스케줄에 쫓겨 형식상 얼굴만 내밀고 부리나케 자리를 뜨는 것과 달리 영화제 내내 극장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영화팬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함께 찍고 사인을 해주면서 한국영화와 관객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다닌다. 1960년 경북 출생인 김기덕 감독은 영진공 시나리오 공모를 통해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시작, 1996년 저예산 영화 ‘악어’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첫 작품부터 평단에 센세이셔널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그는 ‘야생동물보호구역’(97), ‘섬’(99), ‘수취인불명’(2001), ‘나쁜남자’(2002) 등 충격적인 영상과 파격적인 메시지로 매번 평단과 관객의 찬반논란을 일으켰다. 비제도권 출신 감독에서 일약 스타급 감독으로 부상한 것은 ‘섬’이 베니스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면서부터. 이후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유수한 해외영화제에 단골로 초청되고 현지에서 ‘회고전’까지 개최될 만큼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그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다. ‘해안선’(2002년)에 톱스타 장동건이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았고, 그의 9번째 작품인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은 지난해 청룡영화상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봄여름…’을 기점으로 잔혹한 표현과 여성비하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의 작품세계가 화해와 용서로 돌아선 것은 놀라울 만한 일이다. 작가주의적 시선과 사회적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에 투영해 온 ‘저예산 영화의 기수’ 김기덕 감독. “모두가 싫어할 때까지, 내가 싫어질 때까지 영화를 찍겠다”는 그의 왕성한 창작활동에 앞으로도 기대와 관심이 모아진다.
주간현대/정부경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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