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폭발적인 흥행과 함께 강한 남성성을 앞세운 TV 대하드라마가 속속 제작에 착수, ‘강한 남자’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드라마 ‘강한 남성’ 신드롬
강한 남성이 몰려온다. 최근 국내 극장가를 장악한 한국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군대를 소재로 삼아 선 굵은 남성들의 세계를 펼쳐 보인 데 이어, 브라운관에서도 ‘강한 남자’를 앞세운 대작들이 속속 제작에 돌입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근무하면 도둑놈)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만큼 기죽은 가장들이 늘어나고 청년실업의 급증으로 젊은 남성들이 설자리를 잃은 현 세태에서 대중문화 속에 등장한 ‘강한 남성성’이 남녀를 불문한 동경과 갈망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살펴본 ‘강한 남성’ 신드롬의 실체를 살펴봤다.
잘 만든 ‘남성영화’에 여성관객들 열광
지난해 12월24일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개봉 58일 만인 2월19일을 기해 전국관객 1천만명을 돌파했다.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천만관객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남한의 15세 이상 인구 3천5백만명(2003년 통계청 자료기준) 가운데 영화관람이 어려운 인원을 제외하면 주변의 3명 중 1명꼴로 ‘실미도’를 관람한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로 인한 경제효과가 3천억∼4천억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상업적인 흥행뿐만 아니라, 영화 개봉 이후 숨겨져 왔던 ‘실미도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라 북파공작원의 실체, 실제 훈련병 명단 확인 등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지난 2월5일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 역시 무서운 속도로 ‘실미도’의 흥행세를 따라잡고 있다. 이미 ‘실미도’보다 6일이나 앞당긴 개봉 13일 만에 전국 5백만 관객을 돌파, 연달아 ‘1천만 관객’ 흥행신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한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이 참혹하게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태극기 휘날리며’는 순박한 형과 여린 동생이 전쟁터에서 강한 남성으로 변모하며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긴박한 장면을 연출, 가슴 찡한 형제애와 함께 선 굵은 남성 드라마를 이끌어 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친구’ ‘공동경비구역 JSA’ ‘쉬리’ 등 역대 한국영화 흥행순위 5위권에 든 작품들이 한결같이 개성 강한 남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액션물을 표방했지만 드라마적 구도가 강해 여성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는 것도 공통점. ‘친구’를 제외하면 민감한 남북문제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직?간접적으로 다뤘다는 점도 같다.
이 때문에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연령을 불문하고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자신의 군대시절을 반추하며 뭔가 공감대를 찾아내거나, 군인정신으로 대변되는 강한 남성성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분석까지 대두됐다.
‘실미도’를 관람한 한 일본여성은 “터프하고 야성적인 한국남성들 정말 멋있다. 기백 없이 나약한 일본남자들과 비교된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국내 여성관객들도 “극한의 훈련을 견뎌내고 ‘인간병기’로 거듭난 훈련병들을 보며 남성미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며 현실에서 사라진 강한 남성 판타지에 대한 동경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TV도 ‘남성 드라마’ 제작 러시
현재 시청률 1위를 기록중인 MBC 특별기획극 ‘대장금’이 ‘여인천하’ ‘다모’ ‘왕의 여자’ ‘장희빈’ 등 최근 몇 년 사이 유행처럼 번진 ‘여성 사극’ 열풍의 절정이라면, 올해는 사정이 조금 달라질 듯하다.
스크린을 강타한 ‘강한 남성’ 신드롬이 TV 브라운관으로 확산, 올 하반기엔 공중파 방송3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선 굵은 초대형 대하드라마가 연달아 선보일 예정이다.
우선 KBS는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대하사극 ‘이순신’과 해상왕 장보고의 일대기를 담은 ‘해신’을 준비중이다.
MBC는 한국 경제의 쌍두마차 현대와 삼성 두 창업주의 성공신화를 다룬 특별기획극 ‘영웅시대’와 뒤를 이어 하반기에는 고려말 공민왕 때의 실권자 신돈을 다룬 대하사극 ‘신돈’을 기획하고 있다. 또 사극의 대가 김재형 PD를 영입하고도 ‘왕의 여자’의 시청률 부진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SBS는 작가 황석영 소설을 원작으로 한 80부작 ‘장길산’을 통해 ‘여인천하’ 이후 SBS 사극 열풍을 재현하겠다는 각오다.
가장 먼저 오는 5월17일 첫 방송되는 SBS 대하드라마 ‘장길산’은 조선 숙종시대 민중이 갈망하는 개혁을 위해 수구세력에 저항하며 백성들의 나라를 꿈꾸었던 의적 장길산의 일대기를 장중하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야인시대’로 ‘김두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장형일 PD가 연출을 맡아 또 한 번 선 굵은 남성드라마의 진수가 기대된다.
한 달 뒤 오는 6월 방송 예정인 MBC 1백부작 드라마 ‘영웅시대’는 맨주먹으로 굴지의 대기업을 일군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을 극중 모델로 삼아 해당 그룹의 민감한 반발을 사는 등 재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제작진은 복잡한 자식관계와 출생의 비밀 등 논란의 요지가 있는 시놉시상의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 상당부분 완화시킨 후 당초 기획대로 한국 근대와 현대 경제사에 기적과 전설을 만들어낸 이들의 드라마틱한 성공신화와 불꽃같은 삶을 조명하겠다는 방침이다. 극본은 ‘태조 왕건’ ‘야인시대’ 등 남성 대하드라마 전문작가 이환경이 맡았다.
7월께 방송을 목표로 한 KBS 1백부작 대하사극 ‘이순신’은 소설 <칼의 노래>와 <불멸>을 원작으로,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담아낸다. 제작진은 역사적 인물을 통해 확고한 원칙 속에 혁신을 꾀하는, 현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강한 영웅상을 제시하겠다는 각오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 청해진을 만들고 해적을 소탕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일대기 ‘해신’은 최인호의 동명소설을 영상화, 올 가을경 방영될 예정이다. 두 편 모두 한국 방송 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해양사극을 표방하고 있어 카리스마로 무장한 남자들의 박진감 넘치는 해상액션이 기대된다.
30?40대 남자배우 전성시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장악한 ‘강한 남자’ 돌풍은 곧바로 30?40대 남자 연기자들의 몸값 폭등으로 이어진다.
‘실미도’의 흥행으로 설경구 안성기 허준호 정재영 등 출연배우들의 위상이 한층 높아진데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투톱 장동건 원빈은 국제적인 스타로서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친구’ ‘챔피언’ 등으로 개성 있는 남성 캐릭터상을 연출한 유오성은 SBS ‘장길산’의 타이틀롤을 맡아 4년 만에 드라마에 출연하며, 현재 새 영화 ‘도마 안중군’의 주연을 맡아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에 한창이다. MBC ‘영웅시대’는 톱스타 차인표와 전광렬을 주인공으로 내정한 상태.
그러나 아직 기획단계에 있는 드라마의 경우 한정된 주연급 배우들의 빠듯한 스케줄로 인해 출연이 번복되거나 캐스팅 물밑작업이 더욱 치열한 상황이다.
KBS ‘이순신’의 타이틀롤을 맡기로 구두 약속한 영화배우 정준호는 현재 ‘나두야 간다’ ‘가문의 영광 2’ 등 세 편의 영화 출연이 대기중인 상태라 “도저히 ‘이순신’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다”면서 최근 출연을 포기해 왔다. ‘해신’의 경우 제작진은 차승원을 주인공으로 점찍고 애타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으나 최근 새 영화 ‘귀신이 산다’에 캐스팅된 차승원으로부터 아직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밖에 사극에서 더욱 주가를 높인 유동근 최수종 이서진과 영화에서 입지를 높인 이정재 이병헌 등도 캐스팅 0순위로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에 반해 김희선 고소영 김남주 등 복귀를 앞둔 스타급 여배우들은 입지가 더욱 좁아들고 있어 울상이다. 특히 스크린에서 줄줄이 흥행참패의 고배를 마신 이들은 차기작 선정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데, 딱히 자존심을 만회할 만한 개성 있는 캐릭터가 남자배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라 ‘CF 모델’이 본업이냐는 비아냥까지 감수하며 복귀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