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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문화재]보물로 지정된 10점, 소개합니다

천안시가 자료정리한 보물들, 천안의 역사 일부 엿볼 수 있어 

등록일 2025년02월09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문화재’란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뜻한다. 

천안에는 ‘보물’로 지정된 것이 10개가 있다. ‘보물’이란 건조물, 전적, 서적, 고문서, 회화, 조각, 공예품, 고고자료, 무구 등의 유형문화재 중에 중요한 것을 이른다.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 ▲천안 천흥사지 오층석탑 ▲천안 삼태리 마애여래입상 ▲안중근의사 유묵-사군천리망안욕천이표촌성행물부정 ▲이광악 선무공신교서 ▲박문수 초상(1994) ▲천안 광덕사 감역교지 ▲천안 광덕사 조선사경 ▲광덕사 노사나불 괘불탱 ▲김구 서명문 태극기가 그것이다. 

여기에 천안시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타 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보물 2점이 있다. 감지은니묘법연화경(보물269)과 감지금니묘법연화경(보물270)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1.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 
 

고려 태조 4년(921)에 창건되었던 천흥사의 당간지주로 현재 천안시 천흥리 마을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절에서는 의식이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동·서로 서있는 두 지주는 60㎝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 기단은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는데 기단 주위에 안상을 새겨넣어 당간지주의 장식화된 측면을 보이고 있다. 동·서 지주 사이로 깃대를 직접 받치던 받침은 남아있지 않다. 안쪽면에 조각이 없으며 상단 꼭대기끝 한 곳에만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구멍이 있다. 지주의 바깥면은 위에서 아래까지 중앙에 1줄의 선을 새겼다. 

지주 각 부의 양식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나 퇴화된 기법으로 만들어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특히 천흥사터에서 출토된 천흥사 동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원년(1010)으로 되어있어 이 당간지주도 절을 창건하면서 같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2. 천흥사지 오층석탑 
 

천흥사터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거대한 모습으로, 고려왕조 시작 직후 석탑의 규모가 다시 커지던 당시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아래층이 너무 얕아 마치 1층으로 된 듯하다.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각 면마다 7개씩의 안상이 촘촘히 조각되어 있다.

위층 기단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몸돌은 4면의 모서리에만 기둥모양을 뚜렷하게 새겨놓았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이 비교적 완만하다. 지붕돌은 얇고 너비가 좁으며, 밑받침이 3단으로 매우 얕게 조각되었다. 경사면은 가파르다가 이내 수평을 이루고 있어 그 반전감이 크고, 네 귀퉁이에서의 들림은 날아갈 듯 가뿐하다.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돌의 구성에도 규율성이 있다. 특히 탑신에서 보이는 완만한 체감율은 온화하고 장중한 느낌을 더해준다. 

절터에는 탑 외에도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가 남아있으며, 동종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동종은 남겨진 기록에 의해 고려 현종 원년(1010)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탑 역시 이와 시대를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3. 삼태리 마애여래입상 
 

천안시 풍세면 태학산의 해선암 뒷산 기슭 큰 바위에 높이 7.1미터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마애불 윗부분의 바위에는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얼굴 부분은 도드라지게 조각하고 신체는 선을 이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이는 고려 후기 마애불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민머리 위에는 둥근 상투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있다. 양감있는 넓적한 얼굴은 가는 눈, 커다란 코, 작은 입으로 인해 더욱 경직된 인상을 풍긴다. 목은 짧아서 거의 없는 것 같이 보이며 이로 인하여 목이 있어야 할 3줄의 삼도(三道)는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어깨는 넓기만 할 뿐 양감이 없으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하게 처리하였다. 상체와 양쪽 옷자락에는 세로선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하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겼는데, 옷주름은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어 도식화된 면을 엿볼 수 있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했으며 오른손은 왼손 위에 손등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유행하던 미륵불상의 손모양으로 이 불상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불상은 전체적인 형태아 얼굴모습,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의 불상 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마애불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4. 안중근 의사 유묵- 사군천리망안욕천이표촌성행물부정 
 

안중근의사유묵-사군천리망안욕천이표촌성행물부정(安重根義士遺墨-思君千里望眼欲穿以表寸誠幸勿負情)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에서 1910년 3월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지정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일괄지정된 이 작품들은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논어(論語)」·「사기(史記)」 구절 등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을 나타낸 것, 세상의 변함을 지적한 것, 일본에 경계하는 것, 이밖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유묵 대부분은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그중 ‘안중근의사유묵-욕보동양선개정계시과실기추회하’는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여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사람 오리타타다스(折田督)가 받은 것으로, 8·15 광복으로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때 조카 오리타간지(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고, 그것이 1989년 2월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 

또 ‘안중근의사유묵-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는 안의사 수감 당시 여순감옥에서 경관을 지냈던 이의 손자 야기마사즈미(八木正澄)가 2002년 10월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안중근의사유묵-국가안위노심초사’, ‘안중근의사유묵-위국헌신군인본분’는 앞쪽에 ‘야스오까 검찰관에게 증여한다(贈安岡檢察官)’라고 적었듯이 당시 관련했던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사군천리망안욕천이표촌성행물부정(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천리 밖 임 생각에 바라보는 이 눈 뚫어질 듯 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을 표하나니 행여 이 마음을 저버리지 마소서.


5. 이광악 선무공신교서 
 

‘이광악 선무공신교서’는 원래 한 장의 명주 두루마리로 작성되어 있던 것을 후손들이 잘라서 첩장한 것으로, 1988년 보물로 지정됐다. 

공신교서는 ‘敎效忠仗義宣武功臣嘉義大夫廣南君李光岳書(교효충장의선무공신가의대부광남군이광악서)’라는 제하에 이광악의 공적사례, 공신에 대한 포상과 특전, 공신과의 서약, 공신의 명단, 사실증명 등이 차례로 적혀 있는데, 이광악은 3등 5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평정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려진 훈호(勳號)는 호성(扈聖)·선무(宣武)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훈호를 의정할때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시종 호종한 사람을 호성공신으로, 왜군을 정벌한 장수들과 원병과 양곡 요청을 위해 명나라에 왕래한 사신들로서 유공한 사람을 선무공신으로 책록하고, 또 각각 3등으로 나누어 상의 등급을 달리했다.

이 문서는 당초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이주백(李柱白)이 보관해오다가, 1987년 다른 유물과 함께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6. 박문수 초상(1994) 
 

199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폭. 1728년(영조 4)경 작. 비단바탕에 채색. 대본 : 세로 163.5㎝, 가로100㎝, 소본(1) : 세로 59.9㎝, 가로 45.3㎝. 박문수 초상 1점(소본(2))이 2006년에 보물로 추가 지정되었다.

암행어사의 일화로 유명한 박문수의 영정이다. 박문수는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현재 종손가에 전해오는 박문수 초상은 대본과 소본 2점이며, 그중 대본은 분무공신상(奮武功臣像)으로써, 공신상의 전형적 형식을 보여준다.

박문수는 그의 나이 38세때인 1728년 분무공신(奮武功臣)에 녹훈되었고, 화원들이 그린 공신상을 하사받았다. 갈매식 포(袍)를 입고, 두 손을 마주잡은 공수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써, 쌍학 문양의 흉배를 부착하고 학정금대(鶴頂金帶)를 하고 있다.

호피가 깔린 의자, 족좌대 위에 놓여진 팔자형의 백피혜(白皮鞋)를 신은 발의 놓임 역시 전형적인 공신도상 형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단아한 얼굴을 수염이 그다지 많은 편이 못 되는데, 조심스런 음영법의 사용은 공신상 제작에 수준높은 화원이 동원되었음을 엿보게 한다.

전신상은 1728년 학정금대(鶴頂金帶)를 착용한 젊은 분무공신상을 보여준 반면, 반신상에서는 쌍학흉배에 서대(犀帶)를 착용한 연로한 모습으로 품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소본의 경우, 담홍포(淡紅袍)를 입은 흉부까지만 그린 반신상이지만, 화법의 정교함이 두드러진다.


7·8·9. 천안 광덕사 '감역교지·조선사경·노사나불 쾌불탱' 
 

3개의 보물은 ‘천안 광덕사’란 한 곳에서 지정됐다. 

▲천안 광덕사 감역교지 ▲천안 광덕사 조선사경 ▲광덕사 노사나불 괘불탱이 그것이다. 
 

‘천안 광덕사 감역교지’는 조선 세조 3년(1457) 8월10일, 왕이 천안에 있는 광덕사와 개천사에 내린 교지이다. 두 사찰의 잡역을 경감하라는 내용으로, 세조때의 불교정책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현재는 보관의 편의를 위해 각각 3쪽으로 잘라 첩장함으로써 원상을 변형시켰으며 부분적으로 글자가 마모되어 있다. 
 

‘천안 광덕사 조선사경’은 광덕사에 전해지는 사경(寫經)이다. 

사경은 불경의 내용을 옮겨적고 화려하게 장식해 꾸민 것을 말한다. 백지에 먹으로 쓴 ‘부모은중경’과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은혜를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 공양하며 경전을 읽고 외울 것을 권장하고 있다. 다른 경전과 달리 각 내용에 따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부모은중경의 끝에 남은 기록으로 조선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1396~1486)이 부인·아들과 함께 시주해 만든 책임을 알 수 있다.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은 부처의 힘을 빌리거나 수행을 통해 모든 죄악을 없애고 장수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광덕사 노사나불괘불탱’은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법당 앞에 걸어놓고 예배드리는 대형불화를 말한다. 

전체적인 구도는 머리에 보관을 쓴 노사나불을 다른 형상보다 크게 그려 중앙에 배치하고 어깨부분의 양쪽에는 2대 제자를, 그 아래쪽에는 2대 보살이 있으며 둘레에는 사천왕상이 배치돼 있다. 본존은 타원형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둥근 머리광배에는 작은 부처 7구를 표현했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고 양 손은 어깨높이 정도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했으며 배경에 군데군데 구름을 그려넣고 선명한 채색과 더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10. 김구 서명문 태극기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등록문화재 제388호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1876~1949) 주석이 1941년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매우사(미우스 오그) 신부에게 준 태극기이다. 

태극기 바탕에는 광복군에 대한 우리 동포들의 지원을 당부한 김구 선생 친필 묵서가 쓰여져 있다. 2008년 8월12일 문화재로 등록됐으며,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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