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反正)’이란 조선시대, 정도를 잃은 왕을 몰아내고 새 임금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던 일을 말합니다. <정도를 잃은 왕>을 쫓아내는 일이니 명분은 충분합니다.
천안에 반정을 성공시킨 인물의 영정이 있다는 것을 아나요?
천안 광덕의 이귀와 그의 아들들 이시백·이시담·이시방이 그들입니다. 이시백은 영의정으로, 이시방은 영의정에 추증된 인물이니 대단한 가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이귀(왼쪽)와 이시백 영정- 묵재 이귀와 그의 아들 조암 이시백 영정은 문중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함께 동일한 초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묵재와 조암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인조반정(1623년)때 정사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묵재는 1등공신으로 67세, 조암은 2등공신으로 32세 나이로 등록됐다. 반신상 초상화로서 조선후기 초상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2005년 10월31일 문화재자료 제393호 지정.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407-5.>
묵재 이귀(李貴, 1557~1633)
묵재 이귀(李貴, 1557~1633)를 잘 모르신다면 그의 스승이 율곡 이이랍니다.
스승을 따라 10만 양병설에 힘을 싣기도 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항복과 류성룡을 따라 종군했습니다. 이귀는 47세의 나이(선조36년)에 문과에 합격했습니다. 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키고 명나라군에게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 즉위 후 당쟁에 휘둘려 탄핵과 유배에 처했습니다. 1619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1623년 김류, 최명길, 김자겸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모의하여 거사를 일으켜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인조에 옹립함에 따라 정사공신 1등에 오른 인조반정의 대표인사로 꼽힙니다.
인조반정은 이귀가 계획하고 동조자를 규합해 군사를 동원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고 이시백·이시담·이시방 세 아들도 참여시켰습니다.
참고로 이시백은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이름이 오르게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이자 연양군(延陽君)의 지위를 받았습니다.
이귀의 성격은 괄괄했으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를 애둘러 마음에 병이라도 있소 하고 물으면, “맞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의 병이 있으니 나같은 사람이 더 있다면 나라가 더 나아질 것이오”라고 말했다 합니다. 인조반정 이후 좌찬성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영수가 되었고 1626년 이조판서에 올랐습니다.
요즘 정부인사 탄핵중독 논란이 뜨거운데 그도 ‘탄핵’에 자유롭지 않네요.
인현왕후(인조의 어머니) 상에 대하여 김장생과 함께 2년상을 주장하다가 탄핵당했고, 복권 후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자 최명길의 주화론을 지지하다가 탄핵당했습니다. 군비확충에 힘써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오래 버틴 것도 그의 공이 크다 합니다.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강직한 언사로 비록 인조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으나 그가 죽가 왕은 통곡하고 영의정에 올려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합니다.
▲ 부자(父子)의 묘들. 아버지 이귀는 공주에, 그의 장남 이시백은 천안, 차남 이시담은 대전, 셋째 이시방은 보령에 각각 묘를 두고 있다. (이곳은 이시백 묘가 있는 천안 광덕)
조암 이시백(李時白,1581~1660)
이귀와 함께 인조반정에 참여한 세 아들은 모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첫째 이시백(李時白,1581~1660)은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 2등이 되고 이괄난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웠습니다. 효종때 두루 요직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고 연양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실록에는 벼슬살이 38년동안 청렴·근신·검소함에 변함이 없는 선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인조반정에 참가한 둘째 이시담(李時聃, 1584~1665)도 원종공신1등에 녹훈되고 충주목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 근거로 곳곳에 그의 선정비가 있습니다.
셋째 이시방(李時肪, 1594~1660)은 정사공신이고 연성군에 올랐습니다. 이괄의 난 때 토벌공훈이 있으며, 효종때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충청과 전라도에서 김육의 대동법이 시행되도록 죽을 때까지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시백(1592~1660)은 이조 효종때의 사람입니다.
조선 인조때의 명재상이었으며, 천안 광덕의 한 고을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혔습니다. 자는 돈시, 호는 조암, 시호는 충익, 본관은 연안.
이귀의 아들로, 인조반정때의 공으로 연양부원군에 피봉되고 1636년 병자호란때 병조판서로 남한산성을 지켰습니다.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는 효종을 세자로 세우려 하여 신하들의 찬동을 얻었으나 시백은 이경여와 같이 홀로 세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1649년 인조는 시백을 불러서 술을 내리고 또 효종더러 술을 권하도록 하면서 시백을 따뜻이 위로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인조가 죽은 후 1650년에 우의정이 되고 1652년에는 연경에 다녀와서 영의정까지 지냈습니다.
어려서 성혼, 김장생, 이항복 등에서 배웠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힘이 셌으며, 또한 겸손하여 무능한 사람 같았으나 항상 우국지성이 넘쳤고 청렴하였다고 합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무관출신으로 잘못 등장한 이시백.
2017년작 영화 ‘남한산성’에도 등장하는데, 문관 출신인 그가 용맹무쌍한 장수로 나옵니다.
묵묵히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무인입니다. 46세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선, 문관출신이면서 왜란때 활약한 권율장군도 있습니다만.
이시백도 42세가 될 때까지 유생의 신분으로 있다가 인조반정으로 인해 정계에 들어선 케이스입니다. 인품과 능력이야 성혼, 이항복 두 스승으로부터 인증받았으니 부족할 게 없겠고요, 그의 벗이라면 조익, 장유, 최명길 등 당시 유명한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는 1629년 파직되었다가 다시 벼슬에 복귀되었고, 1633년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의 벼슬을 하다가 1636년 남한산성수어가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 당시 도망친 인조를 맞이하여 남한산성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영화 ‘남한산성’의 시대배경이 됩니다.
▲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그 후 1638년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을 때 또 파직. 이런 일들을 거쳐 1655년 영의정에 이르게 됩니다.
인조에 이어 효종 역시 이시백을 매우 신임하였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아첨 대신 충직 하였던 이시백은 1660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그는 크고 널리 존경받았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인조반정때 나라의 큰 어르신인 이원익을 설득하러 가서 장기를 둔 일화가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 안에 큰 변이 일었다. 광해군을 쫓아내고 새 임금, 인조를 세우는 서인들의 쿠데타이다. 반정의 주인공이 시백의 아버지 이귀다.
당시 사회적으로 신망이 두텁고 만백성이 추앙하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오리 이원익이었다. 이원익은 당시 여주의 벽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다.
이시백은 이원익 대감을 뵙고 반정에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았다. 귀양살이 하는 초막에 깜깜한 밤 도착해 인사를 드렸다. 방에는 귀퉁이에 장기판이 하나 있었다.
“대감님, 장기 한 판 두시지요.”
시백이 왜 왔는지를 미리 알고있는 이원익은 한마디 말이 없이 그의 행동을 눈여겨 보았다.
“소생이 먼저 두겠습니다.” 하더니 자기 앞의 궁을 들어 대감의 궁을 느닷없이 쳐서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대감님, 소생이 이겼습니다.”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 짚신을 신고 있어선 후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는 대문을 나섰다.
이원익은 시백의 등을 향해 “잘 해보게” 하고 말했다.
이후 이귀와 이시백은 인조반정을 성공리에 이끌었다 한다.
그로부터 296년 후인 1919년 천안 병천의 유관순 열사가 그의 아버지를 따라 거사를 도모해 ‘만세운동’의 역사적 주역이 된 것은 어떤 인과관계가 없겠는지요.
▲ 인조가 인조반정의 핵심공신인 이시백이 흔들리지 않도록 술자리를 만들었다. 부친 이귀의 공을 자신은 잊지 못한다고 자식들이 과거를 보기를 부탁하자 이에 이시백은 감동하여 “아버지가 눈감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읍하여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인조는 자리를 같이 한 세자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이시백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내가 이분을 팔다리처럼 여기니 너도 뒷날 이분을 높게 대접하라!”라고 당부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