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일의 앞뒤가 있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태원 압사참사자 명단공개’는 아쉬움이 있다.
참사 17일째인 11월14일 정부의 비공개명단 방침과 달리 온라인매체 ‘민들레’와 ‘시민언론 더탐사’ 두 곳이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 추모하기는 아는 사람들이야 상관없겠지만 모르는 이들의 추모에는 구체적 이름과 사진이 있을때 더욱 가깝게 이뤄질 수 있는 점에서 ‘명단공개’가 의미있는 일임을 안다. 이런 이유로 두 언론은 <희생자들을 익명의 그늘 속에 계속 묻히게 함으로써 파장을 축소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재난의 정치화이자 정치공학>이라며 명단공개의 이유를 댔다.
지금까지 대형참사가 발생했을 때 정부와 언론이 사망자들의 명단을 국민에게 공개해왔음을 들어 공개 자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명백한 행정참사라는 점을 들어 정부와 집권여당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단공개의 필요성과 정부책임의 시비를 차치하고, 왜 유족들에게 공개동의를 구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는가. ‘유족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점은 깊이 양해를 구한다’는 해명에는 먼저 동의를 구하고 공개하지 못한 급박한 사정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정부의 비공개 방침이 조문객인 국민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는지, 만약 이같은 방침이 책임을 회피하려는 행위의 하나인지를 규명하지 않은 채 ‘의심’을 ‘사실’로 수용하고 비판하는 행위가 적어도 일부 유족에게 피해를 주는 조급한 판단이나 또다른 의도로써 의심받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는 없는지를 말이다.
물을 엎지르고 잘잘못을 판단하고 수습하려는 ‘과감성’을 두고 일각에서는 <유족의 동의 없이 공개된 점은 부적절하다>며 참사 피해자나 가족들을 위해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다는 보호지침이 국제법상으로 마련돼 있음을 거론하며, 피해자나 가족들이 겪어야 할 상처와 트라우마에 대해 배려치 못한 행위를 지적하기도 한다.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지적한 일이, 또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며 지적당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누구는 책임있는 정부를 욕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희생자를 욕하고, 그리고 일부 언론 등은 명단공개를 통해 또다시 욕을 먹는다. 잘못은 원인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과정 속에서 각자 잘못된 행태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점은 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2차 가해자’가 나타난다. 이는 사건의 피해관련자들에 대한 ‘우선권’을 생각하지 못해 발생하는 것이다. 할로윈 축제에 참여하다 희생당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제각각이다. 언제부터 서양문화에 빠졌느냐는 힐난부터 사람 붐비는 곳에 철없이 모여들었다거나, 심지어 무조건적인 생각없는 비판도 난무한다. 이에 따른 유족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그냥 지나가다 희생된 이도 적지 않을 텐데 말이다.
최근 개봉된 어느 영화에서는 행정공무원이 한 노인에게 쓴소리를 해대는 장면이 있다. “왜 아내분이 돌아간지 몇개월 됐는데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혜택을 누리고 있느냐”고 화를 낸 것이다. 노인도 불같이 역정을 내고 갔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차마 인정할 수 없어 못했다는 속사정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참사명단을 공개한 언론이 ‘(유족들이)이해를 해줄 것으로 봤다’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해 보이는지, ‘언론으로서 본연의 책임감을 다하려는 마음이었다’는 말이 얼마나 가식적으로 들리는지 진정 모르는가.
명단공개에 앞서 ‘공개해도 되는지’를 놓고 유족들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 얼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것이 먼저 선행되는 것의 중요성을 왜 간과했는지 안타깝다. 설마 정부를 지탄하기 위해, 그를 통한 이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는 않았는가.
피해자들을 놓고 벌이는 ‘한판승부’같은 행태들이 아쉽고 안타깝기만 하다. 그게 사람의 ‘못된’ 이기적인 마음이라면 이해 안될 것도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