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호씨는 아내의 간이식 수술비만 3000만원을 마련해야 한다. 각종 검사비, 약값, 입원비 등도 200만원이 넘게 밀려있다. 기저귀를 비롯한 각종 병원용품 비용만 하루에 3만원~5만원씩 지출해야 한다. 도저히 감당할 방법이 없다.
김창호(67·가명, 충남 아산시 도고면)씨의 하루는 22살 연하의 아내를 돌보는 일부터 시작한다.
김씨의 아내 이하나(45·가명)씨는 최근 천안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이식 수술 후 회복 치료를 받고 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담즙성 간경화’라는 희귀난치병으로 투병 중이던 이씨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큰 수술을 견뎌낸 아내를 바라보며 김씨는 안도했다.
김창호씨와 이하나씨 부부는 둘 다 지체장애인으로 서로에게 버팀목 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둘은 대부분 사람들이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하기 힘든 아프고, 처절한 삶을 살아왔다. 처음 만날 때부터 상대의 아픔을 한 눈에 알아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사랑을 키웠다. 상대의 장애와 성격은 물론 22살의 나이까지 극복한 둘은 삼남매의 부모가 됐다.
문제는 이들 장애인부부가 경제활동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직 기초생활수급비 만으로 5가족의 의식주는 물론 두 부부의 병원비를 비롯해 공과금, 식료품과 생활비, 3남매의 교육비를 부담해야 한다.
통장 잔고가 텅 빈 김창호씨는 지금까지 발생한 의료비만도 도저히 감당할 엄두가 안 난다. 간이식 수술비만 3000만원을 마련해야 한다. 또 각종 검사비, 약값, 입원비 등도 200만원이 넘게 밀려있다. 게다가 투병중인 아내의 기저귀를 비롯한 각종 병원용품 비용만 하루에 3만원~5만원씩 지출해야 한다. 두 사람의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인연금을 모두 쏟아 부어도 턱없이 부족하다.
김씨는 곧 나이 70을 앞두고 있다. 병든 아내 하나 돌보기도 힘겨운데 삼남매까지 뒷바라지 해야 한다. 첫째는 올해 갓 대학에 입학했고, 둘째는 중학교 2학년, 셋째는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다. 앞으로 이들 부부와 자녀 삼남매 등 5식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전쟁 중 선천적 장애를 안고 태어나다
김창호씨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전북 고창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씨의 부모는 전북 고창, 충남 태안을 거쳐 서울까지 올라가 정착하려고 노력했지만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왼쪽 다리가 늘 불편했다. 그러나 병원치료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김씨의 부모는 어린 아들의 고통을 외면하며 방치했다. 그 결과 김씨의 왼쪽 다리는 제대로 자라지 못해 오른쪽 다리보다 5㎝이상 짧다. 어린 시절부터 김씨는 두 다리의 균형을 잡지 못하는 불편한 장애를 안고 살아왔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마친 김씨는 다리의 장애와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밥벌이를 해야 했던 김씨는 나전칠기 기술을 배웠다. 김씨는 다리가 불편한 대신 예술적인 감각과 손재주가 뛰어났다.
당시 나전칠기 기술은 가구를 비롯한 장식류 등 다양한 곳에서 활용되던 시기였다. 나전칠기 기술자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김씨는 30살이 될 무렵 대전으로 옮겨 직접 자신의 사업장을 운영했다. 한 때는 사업이 번창해 제법 큰돈을 만지기도 했으나 나전칠기가 급격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던 나전칠기와 달리 대형 가구공장에서 대량생산품이 나오면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벌었던 돈도 모두 탕진한 채 사업장을 정리해야 했다. 그러다 1990년대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아산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미혼이었던 김씨는 공장 등에서 일하며 1998년 중증장애인의 이동을 도와주는 차량 자원봉사를 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기차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여성을 아내로
김창호씨의 아내 이하나씨는 학창시절 매우 총명하고, 학업성적도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고2 무렵부터 갑자기 조현병 증상이 나타났다. 고3이 되면서 증상이 악화돼 대학진학마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대학진학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이씨는 재수를 선택했다. 재수를 하는 동안 운전면허시험도 함께 준비하던 이씨는 도고역에서 예산운전면허시험장으로 향하던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그날 시간에 쫓기던 이씨는 도고역에 도착했지만 기차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씨는 서서히 속도를 올리는 기차를 향해 뛰어가 매달렸다. 그 순간 발을 헛디뎌 두 다리가 레일로 빨려들고 말았다. 이 사고로 이씨는 두 다리를 잃었다.
이씨는 불의의 사고까지 당하자 조현병 증상이 더욱 심해져 세상과 담을 더욱 높게 쌓았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씨는 조현병 증상을 약물로 다스리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다 1998년 장애인이동차량 자원봉사를 위해 찾아온 김창호씨를 처음 만났다.
김씨는 이씨의 이동을 자신이 도맡아 도와주기로 했다. 만남이 지속되면서 둘 사이에 22살 나이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 둘은 남은 인생 서로 의지하고 살자며 부부의 연을 맺었다.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삼남매
1998년 부부의 연을 맺은 김창호‧이하나씨는 2000년 4월 첫째를 낳았다. 그리고 2005년 둘째, 2008년 셋째를 낳았다. 첫째는 딸이고 둘째, 셋째는 모두 아들이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삼남매는 스스로 공부하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삼남매 중 첫째는 올해 삼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디자인공예과에 진학했다. 김씨는 기초연금을 쪼개서 어렵게 첫째의 등록금을 마련해 줬다. 그게 전부다. 생활비나 용돈 지원은 엄두도 못 낸다. 첫째는 앞으로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학교를 마쳐야 한다. 대학 새내기로 선배와 동기들과 어울리며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기는커녕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병원을 찾아 아빠와 교대로 엄마를 보살핀다.
중학교 2학년인 둘째는 로봇만들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는 현재 태권도 4품을 취득했다.
삼남매는 모두 성취욕구와 집중력이 강해 예체능뿐만 아니라 학습능력도 매우 뛰어나다고 한다. 특히 어려운 집안상황에 동요되지 않고 스스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학습에 매진하고 있다.
아내에게 산과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이 죄는 아니라고 하지만 마치 형벌처럼 온 가족의 자유를 구속해 왔다. 김창호씨는 부모와 형제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자식들도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얼마 전 김씨의 아내는 오랜 투병과 절망을 딛고 새 생명을 얻었다. 김씨는 절망을 딛고 기적을 경험하니 조금씩 자신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느낀다. 늘 부족하지만 있는 것에 감사하고, 내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낀 것이다.
김창호씨는 “자식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서 늘 면목 없고 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 자라줘서 정말 고맙다. 아내가 회복되면 숨 막히는 병원을 벗어나 산과 바다와 파란 하늘을 원없이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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