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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엘리트 장교 용기씨는 왜 탈북을 감행했을까?

병들고 지친 남한생활 12년...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선 더 비극

등록일 2019년03월12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박용기씨 부부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얻어 근로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또 둘이 악착같이 모은 돈 6000만원 중 병원비와 약값으로 4000만원을 소진하고, 나머지 2000만원은 사기를 당해 수중에 단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아직도 남한 생활에 적응을 못한 것 같다. 요즘은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나면 펑펑 눈물이 흐른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악몽처럼 느껴진다.”

박용기(56‧가명, 충남 아산시 외암로)씨는 올해로 12년째 남한 생활을 하고 있다. 북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18살부터 군인의 신분으로 살다 장교가 됐다. 또 북한 최고 엘리트 집안의 수재들만 갈 수 있는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교원을 만나 결혼했다.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대 던 중 그는 정치범으로 긴급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감옥에서 끔찍한 고문과 구타를 당해 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그는 죽음의 문턱을 수 없이 넘으며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탈북 당시 4명이 강을 건넜는데, 그 중 한 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인생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파란만장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어촌마을에서 태어나 18살에 군인이 되다

박용기씨는 북한 함흥시 흥남구의 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온 종일 어울려 놀고,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즐거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뛰어놀다 지쳐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허기진 아들을 위해 맛있는 지지미와 만두를 만들어 주셨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셨던 지지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의 인생 중 어린 시절이 가장 풍족했던 것 같다.

그가 11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국전쟁 때 납북포로였던 아버지는 북한 함흥에 정착했다. 납북된 아버지의 신분은 박용기씨의 출세길에 늘 걸림돌이었다.

반면 그는 학창시절 운동실력이 매우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늘 대장역할을 독차지했다. 특히 싸움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청소년기 방황하는 날이 많아지자 어머니는 그를 자원입대 하도록 권유했다.

그가 18살 되던 해 그는 군인의 길을 택했고, 장교를 양성하는 군사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몸담았던 군사대학은 북한에서 김일성 대학에 이어 두 번째로 실력을 인정받는 곳이다. 군사대학을 졸업한 그는 남한의 해병대와 유사한 항공육전대 중대장으로 편입돼 본격적인 군생활을 시작했다.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그는 태권도 8단에 격투기를 두루 섭렵한 뛰어난 전투요원이 됐다.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그는 지금도 무도 관련 책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조예가 깊다.

김일성 대학 졸업한 엘리트 교원과 결혼…행복은 잠시

27살 되던 해 친구들 소개로 5살 연하의 한 여성을 만났다. 북한에서 최고 엘리트 과정인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그 여성은 고등학교 교원(교사)으로 재직 중이었다. 첫 만남에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간곡한 구애를 계속한 끝에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다.

군인과 교원의 만남으로 이뤄진 두 엘리트 부부의 가정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또 두 젊은 부부는 사랑의 결실로 예쁜 딸까지 얻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 부부는 신분이 상승되고,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이들 가정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신의주 출장을 다녀 온 친구가 남한에서 제작한 영화CD를 가져왔다. 내용도 모른 채 박용기씨 아내와 딸 그리고 그 친구가 함께 CD를 재생했다. 바로 그때 남한의 기무사에 해당하는 보위성 요원 5명이 들이닥쳤다.

박용기씨는 정치범으로 분류돼 구타와 취조를 당했고, 교원이었던 아내도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둘은 살던 집도 잃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전도유망했던 박용기씨 나이는 44살, 대대장 계급도 한 순간에 박탈당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박용기씨는 상호감시체계의 사회구조에서 당시 함께 생활했던 부대원에게 고발한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아내는 큰 충격으로 극심한 우울증과 정신병을 앓고 있다. 또 당시 15살이던 딸은 정치범 부모를 둔 낙인이 찍혀 온갖 멸시를 받으며 간신히 연명했다. 딸은 지금 27살이 됐지만 북한사회에서 경제능력이 없어 생존위협을 받고 있다.

당시 아내의 부친은 평양시 당간부로 높은 신분이었다. 그러나 CD관람사건 이후 좌천당해 집안이 몰락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박용기씨 부부와 연루된 집 안팎 구성원들은 모두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당시 남한CD를 함께 관람했던 친구는 아직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생활 적응 중 마주한 시련

북한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박용기씨는 탈북을 결심했다. 중국 연변으로 탈북을 주선해 주는 알선책에게 300만원을 주기로 약속하고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했다. 당시 남성 2명, 여성 2명 등 4명이 동시에 두만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던 도중 등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에 놀라 물살을 가르며 필사적으로 강을 건넜는데 여성 1명이 끝내 보이지 않았다.

중국 연변에 도착한 박용기씨는 한 조선족의 집에 숨어 지내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 곳에 살던 6살 연상의 여성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이들 둘은 한국에 정착하며 부부의 연을 새롭게 맺었다. 박용기씨는 한국 정부로부터 정착지원금 720만원을 받았다. 이 중 탈북을 도왔던 알선책에게 당초 약속했던 300만원과 추가비용 100만원을 지급했다. 수중에 남은 돈은 320만원, 그 돈으로 남한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에 새롭게 정착한 부부는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박용기씨는 생활비를 쪼개 한 달에 20~30만원씩 북한에 남기고 온 아내와 딸에게 보냈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하자 6000만원의 목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박용기씨의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에서 수감생활을 하며 발생한 심장과 폐질환에 각종 합병증이 발생했다. 게다가 2015년 오토바이 사고로 왼쪽 무릎연골과 척추를 크게 다쳤다. 이후 발목, 종아리, 무릎 수술을 받아야 했다. 또 달팽이관 이상으로 평형감각에 이상이 발생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시련은 한국에서 인연을 맺은 그의 아내에게도 찾아왔다. 오래 전부터 어지럼증을 호소해왔던 그의 아내는 심혈관에 이상이 생기는 희귀난치병 질환을 판정받았다. 혈관이 심하게 부풀고, 머리 부분의 혈관 압박으로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류마티스관절염과 C형간염 판정까지 받았다.  

순식간에 사라진 6000만원…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들어

박용기씨 부부는 어느 순간 큰 병을 얻어 근로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또 제법 큰 돈 이라 생각했던 6000만원도 순식간에 소진해 버렸다. 몇 차례 수술과 약값으로 조금씩 지출하던 돈은 어느새 4000만원에 이르렀다. 수중에 남은 돈은 2000여 만원. 이 돈 만큼은 어떻게든 밑천으로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으나, 평소 안면이 있던 지인이 이자를 두둑하게 주겠다며 빌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을 가져간 그는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벼랑 끝에 몰린 박용기씨 부부는 현재 기초생활 수급으로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 둘의 기초생활수급비는 70만원 남짓. 그러나 두 부부가 한 달간 지출해야 하는 병원비와 약값만 30만원이 넘는다. 게다가 임대료와 관리비 14만원, 가스요금 2만원, 교통비 20만원, 통신요금 5만원, 생활비 13만원 등 최소 90만원을 가져야 한 달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낯선 이방인인 두 부부에게 돈 마련할 곳이 전혀 없다. 두 부부 모두 근로 소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 두고 온 아내와 딸에게 생활비를 보내지 못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북한의 두 모녀를 돕기는커녕 자신 한 몸조차 건사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최근 진행된 북미정상회담을 지켜보며 그의 감회는 남달랐다. 박용기씨는 “남쪽 영화 한 편 봤다고 온 가족의 삶이 망가졌다”며 “하루빨리 남북관계가 좋아져서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고, 북녘 땅에서도 더 이상 나 같은 불행한 정치범 가족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처지를 푸념하며 말했다. “남한에서든 북한에서든 가진 것은 건강한 몸 하나 뿐 이었는데, 그마저 모두 무너져 버렸다. 몸이 조금이라도 회복된다면 무슨 일이건 하면서 살고 싶은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충남시사><교차로>는 삶이 벼랑 끝에 내몰린 어려운 이웃을 발굴해 지원하고 응원하는 ‘희망나눔 1004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동행을 위한 1인1구좌(1004원) 기부운동에 시민여러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후원문의:041-555-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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