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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명령 ‘온양경찰서장’…총괄지휘 ‘충남경찰국장’

[민간인학살현장2] 아산시, 민간희생자 추모조례 제정…한국전쟁 민족의 아픔 치유

등록일 2018년03월09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한국전쟁 당시 아산에서만 8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산시는 2015년 7월27일 ‘아산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지원근거를 마련했다.

아산에서 자행된 민간인학살 사건의 희생자는 크게 9·28 수복 시기와 1·4후퇴 시기로 구분된다. 수복시기에는 주로 부역혐의를 받았던 당사자들이 체포·살해됐다. 반면 후퇴시기에는 부역혐의자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함께 살해당했다.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목격자 증언과 각종 자료를 근거로 분석한 결과 아산에서만 8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배방읍 설화산 중턱 산골짜기에 방치됐던 유골들이 67년 만에 양지로 나왔다. 각종 증언과 향토사, 충남경찰사, 행정자료 등을 토대로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조사한 자료를 정리했다.

양민학살 지휘·명령권자 ‘온양경찰서장’

조사결과 양민학살 지휘·명령권자는 온양경찰서장이었다. 당시 온양경찰서장은 조**에서 오**로 임기가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충남경찰국 김**국장의 지휘를 받았다.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하에 경찰은 주로 사찰계에서 부역자 문제를 처리했고 아산지역 각 읍면치안대는 경찰의 지시를 받아 부역자를 체포·이송·처형했다. 치안대는 마을마다 차이가 있는데 대한청년단과 태극동맹, 의용경찰들로 구성됐다. 치안대는 경찰, 면사무소 등과 긴밀한 협조 속에서 부역자 체포·처형을 감행했다.

1950년 10월4일 조 서장 이하 직원들이 온양경찰서에 복귀했다. <충남경찰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경찰이 진주시 까지 혼란된 관내 치안을 각 읍면에서 자위대가 조직돼 공비소탕과 좌익악질분자 숙청에 희생적으로 활약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간벽지에는 공비가 출몰해 식량 및 물품약탈 등 양민을 괴롭혀 오던 중 경찰 진주와 동시에 1950년 10월4일 오후 5시경 치밀한 토벌작전을 전개해 광덕산 등지의 공비 및 악질부역자 389명을 소탕했다.」

억울하게 휩쓸려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50년 10월11일에는 오**서장이 부임해 1951년 4월25일까지 아산지역을 관할했다. 당시 온양경찰서는 사찰경찰이 이** 외 십여 명, 수사경찰 임** 외 십여 명 등 경찰관 수는 의용경찰을 포함해 100여 명 정도 규모였다. 각 지서 근무에는 주임 1명, 순경2~4명 정도 배치됐다.

지서에는 이미 1950년 9월27일경 경찰 선발대가 들어갔는데 그 수는 각 지서마다 1인에 지나지 않았고, 본서와의 통신은 10월초, 본서가 복귀되면서 가능했다. 지서 인원보충은 선발대 입성 한 달 후에야 이뤄졌다.

부역자의 체포와 분류는 본서에서 파견 나온 사찰계 경찰과 해당 지서주임 및 국민회, 태극동맹, 대한청년단 등 지역우익단체의 협조 하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부역자 문제는 해당지역 지서에서 처리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지서 인력이 적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부역자 조사가 이뤄지기 어려웠으며 억울하게 휩쓸려 죽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경쟁적으로 처형가담

배방면은 1·4후퇴 시기 배방지서 한** 주임, 신** 순경과 배방면사무소에 부역자 처형지침이 온양경찰서장으로부터 하달됐다.

신창면은 1951년 1월 신창지서에서 부역혐의자들을 체포·구금한 후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던 중 지서 유** 주임은 의용경찰 오**와 정**를 시켜 창고에 구금된 부역자들을 총살시켰다.

본서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은 사찰계에서 조사를 했는데, 인력이 부족해 다른 부서의 경찰들도 동원됐다. 조사과정에서 구타와 전기고문이 따랐으며 조서가 작성되면 부역혐의자는 등급에 따라 분류됐다. 처형등급으로 분류되면 온양경찰서 오** 서장의 결재를 거쳐 집행됐다. 이 같은 처형은 아산지역에서 1951년 말까지 계속됐다.

아산지역 조사결과 민간인 희생의 주요 가해자인 치안대를 구성한 것은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였다. 대한청년단은 1948년 12월19일 결성돼 한국전쟁 시기인 9·28 수복이후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까지 체포하고 처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기 직전 온양읍에는 청년방위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수복 후 복귀한 방위대원들이 대한청년단과 함께 각 마을의 부역혐의자 체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민간인학살 지휘·명령권자는 온양경찰서장이었다. 당시 온양경찰서장은 조**에서 오**로 임기가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충남경찰국 김** 국장의 지휘를 받았다. 사진은 유해에서 나온 탄피.

부역자가족 낙인찍어, 조사과정 없이 살해

부역혐의자 체포는 주로 치안대와 주민의 밀고로 이뤄졌다. 그렇게 체포된 자들은 치안대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고 해당지서에서 구금·분류된 후 살해되거나 온양경찰서로 이송돼 살해당하기도 했다.

온양읍에서는 대한청년단원 김** 등이 부역혐의자를 체포, 청년단 사무실에 감금 고문했다. 배방면에서는 대한청년단원 정**가 부역혐의자를 색출·체포하는데 앞장섰다. 탕정면은 청년방위대 1소대장 장**, 2소대장 김**가 치안대를 지휘했고 대한청년단 이**단장을 비롯해 장**, 원**, 한** 등이 탕정지서 맹** 주임과 공모해 부역혐의자를 체포·살해했다. 염치면에서는 대한청년단원 홍** 형제가 주동이 되어 대동리 주민들을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조사과정도 없이 살해했다.

이와 함께 향토방위대도 부역자 살해에 가담했다. 특히 배방지서 한** 주임은 향토방위대 장** 대장과 공모해 대한청년단 경리부장 장**와 단원 윤**, 의용경찰 이**를 동원해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을 살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완장차고 두건 쓴 ‘태극동맹’

한국전쟁 전후 국가에서 조직한 청년방위대와 향토방위대 등 준군사조직 외에 9·28수복 이후 민간단체로서 치안활동을 한 것은 ‘태극동맹’이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태극문양을 그린 완장을 두르거나 두건을 쓰고 다니며 부역자 체포에 적극 참여했다.

온양읍은 인민군 점령기에 온양중학교 교사와 남녀학생들이 지하운동단체인 ‘태극동맹’을 조직해 반공투쟁을 전개했다. 태극동맹은 좌익의 정보를 탐지해 우익에 제공하고 비밀리에 전황에 대한 방송을 청취하면서 시국의 변화에 대비했다.

이후 수복시기에는 부역혐의자를 체포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선장면에서는 ‘태극동맹’이 면소재지 군덕리에서 조직돼 단장 정** 이하 단원들이 선장면 일대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을 체포했다.

단원들은 주로 군덕리 청년들로서 인민군 점령기에 핍박받았던 우익인사의 아들이거나 마을에서 힘쓰고 다녔던 사람들이었다. 탕정면에서는 1950년 9월26일 좌익측 사무가 중단됐던 날부터 ‘태극동맹’의 부역자 체포가 시작됐다.

탕정면은 1950년 9월26일 좌익측 사무가 중단됐던 날부터 ‘태극동맹’의 부역자 체포가 시작됐다. 염치면은 ‘태극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태극무늬 완장을 찬 청년들이 부역자를 체포하러 다녔다.

‘태극동맹’의 부역혐의자 체포·조사과정은 인접한 당진군 순성면 백석리의 ‘태극동맹’ 활동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백석리 대한청년단원이었던 이**는 인민군 점령기에 수십명의 청년들을 결합해 ‘태극동맹’을 조직, 지하반공활동을 전개했으며 수복 후에는 부역자 체포활동을 했다.

이**는 1950년 11월초 대한청년단 본부로부터 순성면 백석리에 거주하는 이명규의 부역사실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한청년단 백석리 사무소였던 마을 창고에서 단원 수십명과 함께 이명규를 취조 도중 살해했다. 이처럼 ‘태극동맹’은 대한청년단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며 부역혐의자들을 불법적으로 처벌하고 있었다.

무차별 남발되는 부역자처벌

한편 전쟁 전 소방대원, 민보단, 국민회 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이 인민군 점령기에 은신하거나 핍박을 받아오다가 수복 후 의용경찰이나 치안대라는 이름으로 부역혐의자뿐 아니라 사적으로 악감정을 품은 대상을 부역자로 처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선장면 치안대의 김**와 안** 등은 종래부터 근방에서 힘쓰는 자로 유명했다. 특히 김씨 3형제는 선장면, 신창면 등지를 주름잡으며 부역혐의를 이유로 사람을 살해했다.

아산지역 부역자 살해는 1950년 9월26일~27일 미군이 천안을 지나던 무렵부터 1950년 9월29일 경찰 선발대가 입성하기까지 각 면·읍 치안을 맡았던 치안대에 의해 시작돼 1950년 10월4일 아산경찰서 복귀 후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한국전쟁 직후 부역자 처리의 법적 근거는 1950년 6월2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공포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이었다. 그러나 이 포고령에 의해 극형이 남발돼 실제로 수많은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이 살해되거나 재산침해를 받았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국회는 1950년 9월17일 사형금지법안과 부역행위특별처리법을 제정해 통과시켰지만, 정부는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과도한 부역자 처벌에 따른 문제점이 나타났다.

배방학살 국무총리까지 보고…이승만 정부 외면

1950년 10월14일에는 헌병사령관 장창국 대령이 “청년단체는 군·경 수사기관에 협조임무밖에 없으며, 부역자라 할지라도 불법구속해 구타를 할 때는 그 책임자는 물론 담당자를 엄중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 등 치안대는 수복 이후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부역혐의자 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체포해 살해했다.

아산지역 희생자들을 연행해 처형한 자들은 주로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 태극동맹 이었다. 이들은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처형을 집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결과적으로 온양경찰서장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충남경찰국에도 지휘감독책임이 있으며 공권력의 불법행사를 막지 못했던 이승만 정부에게까지 책임이 귀속된다.

특히 배방면 사건은 당시 국무총리에게까지 신속하게 보고된 만큼 사회적으로 문제됐지만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등 언론에서 배방·신창 사건이 보도되고 신창지서 유** 주임이 기소됐지만 검찰과 경찰, 이승만 정부는 민간인 희생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희생자는 일부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과 그의 가족들이었다. 당시 부역혐의자들은 적법한 조사나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희생됐다. 그 가족들은 ‘마을회의’ 혹은 ‘도민증 발급’이라는 연락을 받고 소집됐다가 이유도 모른 채 살해당했다.

민간인학살은 반인권·반인륜적 ‘국가범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과 관련한 유해매장 추정장소는 여러 구술증언에 의해 사실로 드러났다. 일부 지역에 편중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아산시 배방읍 중리 금광매장도 그 중 하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6년 12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과 관련해 유해가 매장됐을 가능성이 높은 매장 추정지 168개소에 대한 지표조사 및 유해발굴 가능성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진실화해위원회는 59개소의 매장추정지에서 유해발굴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가운데서 사건조사와의 연관성, 유해발굴의 시급성, 유해발굴 현장의 특정여부 등을 고려해 39개소의 우선발굴 대상지를 선정했다.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은 “경찰·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 생명권, 적법절차원칙,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며 “반인권적·반인륜적 국가범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민간인학살 희생자를 집단으로 매장한 폐금광 입구에서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발굴을 위한 사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산시 유해 발굴사업 적극지원, 전국지자체 첫 사례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목격자 증언과 각종 자료를 근거로 분석한 결과 아산에서만 8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배방읍 설화산 중턱 산골짜기에 방치됐던 유골들이 67년 만에 양지로 나왔다.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이 본격 시작되면서 아산시가 전국 최초로 예산을 지원했다. 이를 위해 아산시는 2015년 7월27일 ‘아산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지원근거를 마련했다.

지난 달 22일 유해발굴 시작을 알리는 개토제에서 김장호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 아산유족회장은 몇 번씩 “유해발굴 예산을 지원한 아산시에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아산시 관계자와 아산시의원들이 유해발굴 현장을 방문하자 김장호 아산유족회장이 반갑게 맞으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아산시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방정부로서 한국전쟁 때 군경에 의해 희생당한 민간인 유해발굴 사업에 예산을 전액 지원한 첫 사례로 꼽히기 때문이다. 유해 발굴 사업은 대부분 지방정부가 중앙정부가 할 일이라거나 재정부족 등을 이유로 예산지원을 꺼려 왔다. 예산을 지원하더라도 소요재정 일부를 지원하는 데 그쳐 실제 유해발굴 사업에 어려움이 컸다.

반면 아산시는 유해발굴에 필요한 1억여 원의 예산을 전액 반영했다. 박선주 유해발굴 단장도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에 적극 힘을 보태준 아산시 사례는 전국 지방정부의 귀감이 되는 일”이라고 평했다.

유해발굴 현장을 찾은 복기왕 전 아산시장은 “아산지역에서 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유해수습마저 못 하고 있는 현실을 뒤늦게 알고 지원하게 됐다”며 “늦었지만 지방정부에서 역할을 할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산시와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은 2월22일부터 설화산(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 일대) 폐금광에서 유해발굴을 벌이고 있다. 아산 외에도 전국 곳곳에는 한국전쟁 당시 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가 아직까지 묻혀 있다.

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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