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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3·1절에 돌아보는 천안의 만세운동

충절의 고장 ‘천안’, 허명이 아니다

등록일 2017년03월07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아우내 뿐만아니라 입장·목천 등 곳곳에서 격렬한 만세운동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단 하루 ‘반짝’ 일어났던 독립운동이 아니다.
서울을 비롯해 평양과 의주 및 원산 등 6곳에서 봉기했고, 다음날은 함흥과 해주 및 개성 등 이북 전 지역에서 차례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중순 이후에는 전국 곳곳은 물론 만주와 미국 및 일본 등지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확산됐다. 3·1운동은 이후 거족적인 저항운동으로 1년여나 이어졌다.
천안의 3·1운동이라면 유관순(柳寬順) 열사가 주인공인 아우내 만세운동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천안에서는 이에 앞서 수많은 만세운동이 일어났었다. 천안이 ‘충절의 고장’이라는 말은 결코 허명이 아니다.

천안 최초의 만세운동은 ‘목천’으로부터

목천기미만세운동 기념식.

천안 최초의 만세운동은 3월14일 목천읍에서 벌어졌다.
1919년 3월14일 오후4시 무렵, 목천보통학교(현재 목천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약 120명(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는 171명으로 계산)은 교정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학생들은 교정 한쪽에 헌병 분대가 있었음에도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헌병 분대 앞으로 이동해 만세를 부르고, 학교 밖으로 진출해 만세 운동을 이어갔다.
이 시위를 앞장서서 이끈 인물로 네 명이 체포됐는데,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전해 오는 기록이 없다. 당시 목천 보통학교 학생들의 나이는 13~23세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목천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는 1989년 3월14일 목천초등학교 운동장 동쪽에 높이 3.5m의 기념비를 건립해 매년 기념식을 갖고 있다.

광부·학생들이 주도했던 ‘입장만세운동’

입장만세운동 기념식에서 만세를 부르는 참가자들.

목천 만세운동이 발생한지 6일 뒤, 3월20일 입장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날 오전10시경 직산금광 광부였던 안시봉 선생과 인근 사립인 광명학교의 교사 및 학생, 주민 약 70명은 양대리 시장을 누비며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시위 행렬은 양대리 시장에서 3㎞ 떨어진 하장리의 입장시장을 향했다. 입장시장에서 군중은 600~700명으로 불어났다. 안시봉 선생은 이 사건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3월28일에는 입장면 직산금광회사 광부들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교대시간을 이용해 시위에 나서 헌병 주재소의 헌병 및 천안 철도 원호대 수비병과 충돌했다. 합세한 군중들도 주재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려고 격투를 벌이는 한편, 통신을 단절시키려고 주재소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격렬한 장면이 연출됐다. 입장면에서는 3월30일과 4월8일에도 면민들의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기념사업회는 1990년 4월 양대리에 입장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3월20일마다 기념식을 갖고 있다.

3000여 주민 함께한 ‘천안읍 만세운동’

3월29일 천안군 천안읍내에서는 약 30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는 시위가 전개됐다.
이날의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이문현(李文鉉)·허병(許柄)·최오득(崔五得)·인시봉(印時鳳) 선생 등이었다. 이날 천안 헌병 분대는 일본 수비대와 합세해 군중들을 향해 발포하고 26명을 체포했다. 당시 일본 헌병들은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두루마기에 파란 잉크를 칠해 후에 이 표식을 보고 체포했다고 한다. 이날 시위는 군중 가운데 약 30명이 갓을 떨어뜨릴 정도로 격렬했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3월30일에는 풍세면 풍서리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 위 20여 곳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다. 그중에서 약 200여 명은 풍서리 시장으로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31일에는 성환면에서도 수천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4월1일(음력 3월1일), 유관순 열사가 앞장섰던 아우내 장터의 만세 함성이 그토록 높았던 것은, 이처럼 면면이 이어졌던 천안인들의 애국 정서가 그 바탕이지 않았을까.
<희>

삼거리공원에 살아 숨쉬는 천안의 독립운동가들
대한광복회 7인 의사의 기념비, 그 속에 숨겨진 사연

삼거리공원에 자리잡고 있는 ‘독립투쟁의사광복회원기념비(獨立鬪爭義士光復會員記念碑)’

천안시는 앞으로 300억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해 ‘천안삼거리공원’을 전 국민은 물론 외국인도 즐겨찾는 대표 명소로 조성할 계획이다.
시는 이를 위해 천안삼거리공원 명품화 사업 자문단을 위촉하고 2016년 9월부터는 4명으로 구성된 TF팀까지 구성해 운영 중이다. 2017년 11월에는 실시설계 및 실시계획 인가 등의 행정절차를 완료하고 2018년 4월 공사발주까지 예정돼 있다.
명품공원으로 거듭날 예정인 천안삼거리 공원. 하지만 이 삼거리공원에 우리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거리공원 영남루 옆에서 청삼삼거리 쪽으로 조금만 더 둘러보면 오래 된 팔각탑 하나를 찾아볼 수 있다. 3.6m 높이의 이 석탑은 바로 광복회가 설립한 ‘독립투쟁의사광복회원기념비(獨立鬪爭義士光復會員記念碑)’다.
이 기념비에는 경북 칠곡의 친일부호로 관찰사를 지냈던 장승원을 처단한 유창순 의사, 친일면장으로 독립운동의 염탐꾼 노릇을 하던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한 장두환 의사를 비롯해 성달영, 김정호, 조종철, 류중협, 강석주, 유창순 등 7명의 ‘천안 출신’ 광복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의사들의 이름이 선명한 이 ‘독립투쟁의사광복회원기념비(獨立鬪爭義士光復會員記念碑)’에는 작은 사연하나가 숨어 있다.
원래 이 기념비는 천안교육청을 통해 초등학교는 10원, 중학교는 20원, 고등학교는 30원씩 성금을 걷어 조성되고 있었고 1964년경 거의 제작이 완료됐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외무부장관, 총리 등을 지냈던 장택상씨는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한 ‘유창순’ 의사의 이름이 새겨져 기념되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념비는 완성된지 5년여가 지나 그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현재의 자리에 세워질 수 있었다고.
<이진희 기자>

대한광복회 유창순 의사(1881~1944)

유창순 의사 영정. 유창순 의사는 천안 출신으로 1913년 경북 풍기광복단에서 활동했다. 의병적 성향의 인물들이 참여했던 풍기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 계획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유창순 선생은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해 1915년 결성된 대한광복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해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해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의협 투쟁으로서 총독처단과 친일부호 처단 등을 추진했다.

유창순 의사는 경상도 지방의 친일부호를 조사해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 친일부호 처단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했다. 이후 1917년 11월, 채기중·강순필·임봉주 등과 함께 칠곡(漆谷)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했으며, 이때 ‘처단 고시문’을 붙임으로써 광복회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됐고 1918년 일제에 붙잡혀, 15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희>


인터뷰-3·1여성동지회 김정수 천안지회장
3·1정신 이어가는 삼일여성동지회

“일편단심 조국 위해 몸 바쳤던 우리 동지
오늘 다시 모였구나 세월은 흘렀지만
3·1정신 변할소냐 애국일념 변함없다
이 마음과 마음 바쳐 조국 위해 살리로다”
-3·1여성 동지회가 중

“3·1여성동지회의 시작은 1947년 유관순 기념사업회부터라고 할 수 있죠. 정식 출범은 2·8 독립만세에 참여했던 황애덕 전 숭의여학교 교사의 제안에 따라 지난 1967년에 시작됐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조카며느님인 김정애씨가 직전 회장을 맡으셨고 지금도 명예회장으로 활동중이세요. 천안에서는 1990년 독립운동가 이관구 선생의 아드님인 이하복 전 광복회장의 부인 노영자님이 초대회장을 맡으시고 활동을 시작하게 됐답니다.”

3·1여성동지회 김정수 천안지회장. 김정수 천안지회장은 3·1여성동지회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3·1여성동지회의 설립목적은 숭고한 삼일독립정신을 국민의식 개혁의 기본으로 삼고 국민의식 교육과 계몽으로 민족정기를 정립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김 회장은 지난 2007~2010년까지 천안지회장을 맡았고, 2013년부터 지금까지 다시 모임을 이끌고 있다.

“2·3월, 8·9월이 특히 바빠요. 2월에는 총회와 아우내봉화제가 있고, 3월에는 삼일절 기념식과 한국여성독립운동사 학술연구대회 등이 정기적으로 참가해요. 충남도가 주관하는 유관순상 시상식도 이때 열린답니다. 8월에는 광복절 기념식이, 9월에는 9월28일 돌아가신 유관순열사의 추모제가 열리죠. 우리 회원 모두는 3·1운동 정신과 애국애족의 마음을 노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려고 한답니다.”

김 회장은 지난 2014년 일부 한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 열사가 누락됐던 것을 알고 시정요구 운동을 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당시 3만명 정도가 서명했었는데 3·1여성동지회가 1만5000명의 서명을 받을 만큼 최선을 다했었다고. 최근 천안시 여성단체협의회에 가입하면서 단체의 이름과 활동을 더욱 알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는 김정수 회장.

“천안은 누구나 말하는 애국충절의 도시입니다. 유관순 열사와 3·1운동의 정신을 통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천안에서 부터 불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라나는 아이들도 그런 마음을 이어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기회를 만들고 앞장설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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