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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보다 위대한 촛불 시민혁명”

이이화, " 어긋난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민중의 분노"

등록일 2017년02월28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역사학자 이이화는 ‘역사는 반복 된다’며 조선의 마지막 100년 ‘민란의 시대’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촛불혁명’을 비교하며, 민중의 분노를 유발한 ‘부패한 자본과 권력’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능한 정치, 부패한 관료, 탐욕에 눈먼 재벌, 부도덕한 기득권은 언제나 민중을 자신들의 도구로 이용해 왔다. 또 갈수록 악랄해져 사람의 목숨마저도 가볍게 취급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노출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과 폐단은 그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다. 촛불혁명은 어긋나고 있는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민중의 심판이다.”


역사학계의 큰 스승이며 원로로 존경받는 역사학자 이이화(80) 전 역사문제연구소장이 아산시 온양문화원을 찾았다.

그는 ‘충남의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아산’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촛불혁명은 ‘프랑스혁명보다 위대한 정의로운 민중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세력이 정권을 잡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역사는 반복 된다’며 조선의 마지막 100년 ‘민란의 시대’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촛불혁명’을 비교하며, 민중의 분노를 유발한 ‘부패한 자본과 권력’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800년 개혁 정치를 추구하던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맞고, 순조가 즉위한다. 정순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이내 김조순이 권력을 휘어잡아 안동 김씨의 문벌 정치가 시작된다. 이것이 조선의 19세기 첫 페이지다.

온갖 적폐로 민중의 삶이 피폐해져 가던 때,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세력들이 정치의 중심에 섰다. 그들은 민중의 삶을 수렁에 빠뜨리고, 부와 권력을 독점한다.

그러자 전국에서는 크고 작은 봉기가 잇따랐고 민란도 연달아 일어났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홍경래의 난’이라 불리는 관서 농민전쟁이다.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며 문벌 집단의 차별과 부정을 직접 체감한 홍경래가 차별을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던 평안도 지역의 민중들을 규합해 봉기한 것으로, 조선후기 최대 규모였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에 자극받아 크고 작은 봉기들이 계속됐다.

 
“특권과 반칙사회, 쌓여가는 민중의 분노”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독점과 특권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민중의 자각과 분노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부패기득권에 대한 쌓이고 쌓인 농민들의 불만도 폭발했다. 이전까지 봉기들은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층이나 중소 상인, 도성의 빈민층 중심이었다면, 삼정문란이 극심해지면서 조선시대 경제의 근간이었던 농민층까지 저항의 대열에 합류했다.

1862년 초 지리산 밑자락에서 시작된 봉기의 불씨는 경상-전라-충청도로 옮겨붙어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삼남의 농민봉기는 조직적으로 이뤄지지 못해 그 한계가 명확했다.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사상과 교단조직을 이용해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동학교도와 민중이 연합한 결과로, 19세기 민중역량의 총집결이라고 할 수 있다. 1차봉기는 신분해방을 위한 반봉건 운동, 2차봉기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더욱 커져가는 일본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침략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외세에 꺾인 민중저항, 의병으로 이어져”

동학 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해인 1895년부터 1910년 한일병합이 이뤄질 때까지 민중의 저항은 항일의병 형태로 나타났다.

초기 중심세력은 전통유림과 동학농민세력 그리고 개화세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는 미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됐다.

전통 유림은 신분제 철폐 등을 외치는 동학농민 세력과 묵은 봉건체제를 손보자는 개화세력을 아군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동학농민 세력에게 전통유림은 타도할 지배세력이었고, 외세와 통하는 개화세력 역시 믿을 수 없었다.

개화세력의 입장에서는 기성질서를 유지하려는 전통유림과 개화에 반대하는 동학농민 세력이 모두 넘어야 할 벽이었다. 이런 대립관계 속에서 의병의 사기는 유지되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봉건질서를 고수한 유림의병장들이 주도권을 잃고 신돌석, 안규홍 등 평민 의병장이 등장하면서 의병 활동은 다시 활기를 찾는다.

이들은 애국이나 위민 같은 가치보다는 일본의 이권침탈과 미곡유출 등 생존권 문제에 더 민감했다. 이런 구체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춰 더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1908년 13도 연합부대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신돌석, 안규홍 등도 살해되고 만다.

1909년에는 이해에만 1만7000여 명의 의병이 살해됐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그렇게 한일합병의 1910년이 다가왔다.

 
“촛불 시민혁명 앞에서 조선의 몰락을 돌아보자”

조선시대 말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고 법 위에 군림해온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지배수단을 위해 백성과 국민을 도구로 희생시키고, 각종 자원을 외세에 팔아넘겼다.

이이화는 “우리나라 민중의 힘과 저력은 프랑스혁명보다 위대하다.

3·1운동, 4·19혁명, 6월 민주항쟁 그리 오늘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중 저항운동은 불의에 맞서 싸운 우리민족의 위대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며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과 폐단이 드러나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지금, 조선이 몰락하는 마지막 100년과 그 시기 민중들의 외침을 차분히 되돌아보자”고 말했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누구?

이이화는 한국의 지역갈등과 전통적 신분질서를 타파하는 글을 쓰면서 민족사, 생활사, 민중사를 복원하는 데 열정을 기울이고, 일생을 역사연구에 바쳤다.

특히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인물을 재평가하는 역사의 현재화, 재미있고 쉬운 문체로 일반에게 다가가는 역사의 대중화에 공헌했다.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규장각, 성심여대 역사학교수, 서원대 석좌교수,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비평’ 편집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을 지낸 그는 지금도 왕성한 역사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5000년의 통사를 기록한 22권 분량의 방대한 역사서 ‘한국사이야기’를 비롯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이야기 한국인물사’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한국의 파벌’ ‘허균’ ‘우리겨레의 전통생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리니’ 등을 저술했다.

최근에는 촛불혁명으로 다시보는 19세기 조선민중의 저항 내용을 담은 ‘민란의 시대’를 펴냈다.

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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