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연휴 SBS가 방송한 ‘한가위 SBS MC 총집합’이란 오락프로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못할 만큼 놀라운 진풍경이 벌어졌다. 평소 지성미와 기품 있는 우아함을 미덕으로 내세우던 아나운서들이 마치 학예회를 방불케 하는 요란한 복장으로 등장, 너도나도 ‘가수 흉내 내기’ 총력전을 펼쳤던 것.
이현경 아나운서는 이정현의 ‘와’를 립싱크하며 완벽한 의상과 춤을 선보여 시청자를 경악시켰으며, 엘비스 프레슬리로 분장한 김정일 아나운서의 ‘버닝 러브’ 모창은 무대를 폭소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이날의 압권은 SBS 아나운서실의 대모격인 중견 아나운서 유영미의 신신애 모창.
실제로 신신애로부터 의상과 춤동작을 전수받았다는 유영미 아나운서의 ‘세상은 요지경’ 모창은 최근 방송가에 몰아닥친 ‘아나운서의 엔터테인먼트화’ 절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아나운서들을 꽃단장시켜 무대위로 내보내기는 SBS뿐만 아니다. 공영방송인 KBS와 MBC에서도 명절 때마다 특집프로를 만들어 선보일 만큼 적극적이다. 물론 방송사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평소 주체못할 끼를 꾹꾹 억누르고 있던 아나운서들도 이 순간을 기다려온 듯 물 만난 고기마냥 마음껏 끼를 발산한다.
아나운서들이 각종 오락프로에서 던지는 폭소탄은 시청자들의 허를 찌르기 충분하다. 다소 무겁고 권위적인 이미지에서 느껴지던 거리감이 일순간 사라지는 것은 물론, 평소 점잖던 아나운서들의 망가진 모습에 야릇한 카타르시스마저 느낀다.
생각지 못한 의외의 행동에 웃음의 강도는 개그맨들을 위협할 정도. 사실 아나운서의 연예인화는 ‘아나운서= 뉴스 진행’이라는 고정된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자기 경쟁 사회에서 고정된 이미지로는 살아남기 힘든 법, 스스로 연예인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아나운서들은 시청자들과의 친숙함을 앞세워 그만큼 다양한 활동 폭도 보장받는다. 이른바 ‘튀는 아나운서’들은 전문MC 부재에 시달리는 각종 쇼프로나 대형 오락프로 진행자로 캐스팅 1순위에 오르기 때문이다.
톡톡 튀는 외모와 파격적인 진행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KBS 황정민 아나운서는 93년 입사 이후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아나운서 스타일로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98년부터 라디오 ‘FM 대행진’ 진행을 맡아 목소리 톤을 높이며 ‘연예인 기질’을 드러내자 현재 서른한살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발랄한 ‘신세대형 아나운서’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자유분방한 풍토에 익숙한 신세대 아나운서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뉴스보다 예능 프로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아 이 같은 현상을 가능하게 한다. SBS의 윤현진 아나운서를 비롯해 MBC의 김경화 아나운서, KBS의 윤인구 아나운서 등은 오히려 연예 정보프로의 리포터로 유명세를 쌓고 있는 중.
최근에는 본업인 진행을 벗어나 다른 분야로 ‘외도’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SBS 이현경 아나운서는 자사의 주말드라마 ‘화려한 시절’에 출연 중이며, SBS 출신의 프리랜서 아나운서 유정현은 본업이 의심스러울 만큼 드라마와 오락프로를 오가며 다방면에서 맹활약 중이다.
아예 아나운서 명함을 버리고 연예인으로 전향한 경우도 있다. KBS 아나운서 시절부터 각종 연예프로에 출연하며 끼를 발산해 온 임성민은 프리랜서 선언 후 과감하게 연기자로 변신, SBS 시트콤 ‘여고시절’에 이어 SBS 성탄특집극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여주인공을 맡아 새로운 ‘탤런트 인생’을 펼쳐가고 있다.
다소 권위적이고 엄격하던 아나운서실 분위기가 과거와 달라진 것도 이 같은 현상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예전 같으면 “채신머리없이 무슨 짓이냐”며 선배들로부터 한소리 들을 법도 한데 요즘엔 시청률 경쟁에 시달리다 보니 ‘윗선’에서 오히려 연예인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MBC는 한때 개그프로에 출연해 걸쭉한 입담을 선보인 MBC 아나운서 부장 이윤철을 비롯해 신동진 이재용 신동호 등 남자 아나운서들의 활약이 돋보이며, 프리랜서를 선언한 이금희 손범수 백지연 등은 개인 매니저를 따로 둘 만큼 연예인 못지않은 대접을 받으며 CF와 방송을 오가며 맹활약 중이다.